영원한 사랑이 있다면(독서의 습관화)

- 내가 꾸리는 삶

by 리라

이것은 여러분을 제대로 홀리려고 작정한 나의 ‘이야기’이다. ‘읽고 쓰는 국어의 심장’을 이식하기 위해 나의 영혼이라도 바치려는 것이다. 교사 초년 시절에 멘토가 되는 국어 선생님이 그러셨다. “선생님의 진심을 애들이 알아요.”라고. 글쎄. 난 그것에 대해서는 아직 의심이 많다. 국어를 가르치다 보니, 난 모든 대상에 대해 자세히 살핀다. 그래서 책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자습서도 틀린 말을 잡아내겠다는 각오로 읽으며(교과서도 수정한다), 여태까지 모든 교사에게 칭찬만 들었다는 학생한테도 조언한다. 마치 탐정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산다. 이상한 것을 속속들이 잡아낼 거야. 나처럼 이 책을 읽었다면 정말 고맙다.

언제까지 여러분 곁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앞서 인용한 장석주 씨의 ‘나의 독서 편력기’의 첫 부분에는 독서의 거장, ‘보르헤스’가 등장한다.


쉰여덟 번째의 생일을 보낸 뒤 보르헤스는 완전한 실명에 이르렀다.
실명이 평생 책과 함께 살아온 보르헤스의 책을 향한 열망을 꺾지는 못했다.
눈이 멀자 그는 주위에서 책을 읽어 줄 사람을 구했다.
피그말리온이라는 서점에서 일하던 소년 알베르토 망구엘도
그 서점 단골이던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 주는 사람으로 발탁되었다.
국립 도서관장을 지낸 대작가 보르헤스는
서재에서 16세 소년이 책을 읽으면
조용히 경청했다. (하략)
- 장석주, '나의 독서 편력기' 중


보르헤스처럼 많이 읽으면 실명에 이르는 걸 보여주기 위해 인용한 것이 아니다. 솔직히 보르헤스처럼 될 정도로 우린 읽지 못한다. 우리 눈이 나빠진다면 아마도 지나친 광속(전자파도 포함된) 때문일 것이다. 말하고 싶은 것은, 죽기 직전까지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읽어야, 써야 살아갈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은 아마도 한국인일 것이다. 한국인은 우리말, 국어에 탁월해야 살아갈 수 있다. 그냥 잘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잘 읽을 수 있어야, 다른 사람 말도 이해하게 된다. 잘 쓸 수 있어야, 내 말을 다른 사람이 이해하게 된다. 이해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로 절대 나아갈 수 없다. 이야기가 본질로 들어가지 못하고 빙빙 돌게 된다. 대화도 빙빙 돌면 금방 끝난다. 말을 잘 못 알아듣는 이에게 사랑과 신뢰를 주는 이는 없다고 생각해도 좋다.

나는 짝사랑의 대가이다. 나의 특기는 정말 아무도 못 말릴 정도이다. 누군가 왜 짝사랑을 하냐고 묻는다면. 수줍게 말하고 싶다. 이 사랑의 방식이 모두를 평화롭게 한다고. 내 사랑에 상대가 부담스러워할 필요도 없고, 더불어 내 사랑에 대한 대가를 요구할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내가 절대적으로 이익이다. 상대를 사랑하게 되면, 나의 마음이 사랑스러워진다. 즐겁고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내가 좋아하는 대상은 아주 다양하다. 주변에서는 내가 아이돌 팬(소위 덕후)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 나는 일찍이 책 속에 나오는 무수한 캐릭터들과 사랑에 빠졌다. 대학 시절, 뒤늦게 조덕기에게 빠져, 화장실에서도 읽을 정도였다. 사실 ‘삼대’는 고등학교 입학 전 읽었던 소설이었다. 신입생들에게 무조건 읽어오라고 시킨 필독서였다. 그때는 의무감에 심드렁하게 읽다가, 대학 시절에 다시 읽다 보니, 덕기가 너무 반듯하다. 그렇게 부잣집에 태어났는데, 아버지처럼 생각 없이 놀고먹지 않는다. 사실 조부가 일으킨 집안은 대(代)가 진행될수록 희미해질 수 있다. 그만큼의 열정과 노력을 모르고 컸기 때문이다. 시대착오적인, 구시대적인 가치관에 반발만 하는 게 손쉽기 때문이다. 쉽게 얻은 건 쉽게 없어진다. 이야기 속에 푹 빠져서 상상하며 읽으면, 자세히 보게 되고, 그것이 보석임을 알게 되며,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지게 된다. 요즘 말로 ‘금사빠’가 아니니, 그 짝사랑은 실망하지 않고 계속될 수 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은 긍정적으로 살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와 무슨 관계를 맺어서가 아니다. 내가 그에 대해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만으로도 두근두근하며 심장이 요동친다. 사실 그 짜릿한 흥분을 우린 손쉽게 얻을 수 있다. 바로 독서 행위이다. 책을 읽으면 영상을 보는 것처럼 자극적 쾌감이 바로 오지는 않는다. 마치 영상은 그것을 고심해 만든 사람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우리한테 일방적으로 선사하는 방식이다. 즉 영상을 고심해 만든 사람만이 자기 심장을, 영혼을 사용한 것이다(소위 영혼을 갈았다고 한다). 우린 그저 눈으로만 즐기면 된다. 그에 비해 독서 행위는 그것을 고심해 만든 사람과 그것을 읽는 사람이 비교적 동등하게 만나는 행위이다. 그의 심장도 사용되었지만, 우리의 심장도, 영혼도 사용된다. 왜냐하면 우리도 읽으면서 사고가 뻥 열리니까! 그리고 사고를 글로 나타내며 나(책)를 만들 수 있으니까! 심장의 동맥과 정맥처럼 읽기와 쓰기는 서로 선순환한다. 보르헤스가 위대한 독자였지만, 다양한 글을 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반복해 말하지만, 읽는 건 쓰기 위함이다. 쓰지 않으면, 말하지 않으면 인간은 자신의 심정과 생각을 표현할 수 없다. 표현이 막히면 철저히 외로워진다(이것은 고독과 다르다. 자신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독하게 읽어야 한다). 이러니 읽기와 쓰기는 동전의 앞뒤처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처럼 딱 붙어야 한다.

나의 ‘최애’도 자기 전에 책을 읽는다고 한다(나도 여러분을 위해 진짜 영혼을 갈아 넣는다). 자기 전 반드시 하는 의식처럼, 책을 읽는 것이 최고의 습관이자 영원할 수 있는 사랑과 기쁨이다. 이런 독서 습관을 지닌 사람은 공공 화장실 청소를 하든지, 공연 무대에 서든지 간에 다른 사람과 달리, 성숙한 삶의 길로 나아간다. 기존의 길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간다. 위대한 선조가 자신의 길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독서 습관 덕분이었다.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의 겉모습이 그 사람의 전체라고 착각하지 말라. 화려한 치장에 아니면 허름한 볼품없음에 절대 현혹되지 말라. 그 사람의 세상을 대하는 태도만을 주목해 달라. 최애의 인터뷰는 나를 흐뭇하게 한다. 다시 한번 나의 소설, ‘어둠을 간직한 낮’을 인용한다.


그의 말이 맞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 말을 하는 그가 갑자기 멋져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홀린다는 건, 언어에 의해서다. 그의 진심을 알고 싶다면
그의 언어를 보라. 그것이 살아 있는지 보라. 팔딱팔딱 뛰고 있는지 보라.
신선하게, 그러나 사람의 영혼을 훔칠 수 있을 정도로 따뜻하게.
- '어둠을 간직한 낮'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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