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사람은 타인의 고통이나 좌절을 머리로만 이해할 때가 종종 있다. 결핍이 주는 아픔을 느껴본 자들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주어진 부조리의 것들을 이해할 수 있을거다. 나의 아픔과 같은 것을 겪어보지 못한 자의 말은 꽤나 이성적이며 차갑다. 상대는 전혀 그런 의도로 던진 것이 아님에도 그 말을 받는 이의 마음이 마냥 편하지 않을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결핍이 하는 역할이 바로 이런 것이다. 빈 것으로부터 아픔, 또는 슬픔을 느끼는 것. 삶의 순간 순간마다 닥쳐오는 아픔은 그만큼의 삶을 배우는 때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삶을 배워서 뭐하겠나, 배움은 언제나 길을 제시하고, 더욱 좋은 방향을 가르킨다. 잘 살아가고 싶은 자는 많지만, 자신의 결핍을 사랑하고 뛰어넘는 자는 드물다. 여전히 그 우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며, 길에 뛰어다니던 메뚜기도, 꽃에 잠시 쉬고 있는 귀여운 엉덩이를 가진 꿀벌도, 만개하여 서로 잘났다고 앞다퉈 아름다움을 뽐내는 열매들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비가 오면 깊어지는 물속을 보며 두려움만 느끼며 얼른 이 비가 그치길 바란다. 그 비가 조금 더 거세게 내려, 언젠간 그 우물밖을 나갈 수 있음은, 두려움에 가려지고 만다.
그러나 결핍이 있다고 해서 마냥 나쁜것만은 아니다. 바닥을 쳐보고, 돌아가기도 해본 사람은 나와 같이 방황하는 자의 아픔에 깊은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 내게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과정과 그에 맞는 결과만 있다면, 나의 뼈아픈 경험들이 나중엔 누군가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써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 주어진 그 상황을 벗어나려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더욱 질문을 통해 본질에 닿을때가 있다. 행복하지 않았던 사람일수록, 그리고 더 나아가 행복해지려 발버둥을 친 사람일수록 행복에 대해 더욱 많은 질문과 답변을 오가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행복에 대한 기준만 남겨두고자 한다. 영원히 배부른 자는 더이상 먹을것에 관심이 없다. 배고픈 사람만이 밥을 먹을 수 있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 지 궁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영원히 배부른 자는 없건만, 배부름이 영원할 줄 아는 자들은 더러 보인다.
행복 뿐만이 아니다. 관계, 사랑, 진로 등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전문가들이 우리가 생각치도 못한 답변을 내놓을때가 있을 수 밖에 없는건, 그들은 비전공자보다 무수히 많은 질문과 찾았던 답변들, 그 속에서 오류를 수정하는 과정들을 거쳐오기 때문이다. 수없이 틀려보고, 깨져보고, 고쳤던 반복의 과정을 거쳐온 사람들이 내린 기준은 중요한 기준이 될때가 종종 있고, 우리의 무의식 속 해결되지 않은 질문에 명쾌한 답변을 내려주듯 상쾌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 그리고 너무나 가지고 싶었던 것을 원하면 원할수록,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과정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러니 포기말고, 오늘도 열심히 부단히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묵묵히 노력하고 쫓아가자. 그렇다보면 나만의 답을 내릴때가 있다.
그냥 결핍이 있는 사람은, 남을 도울 수 없다. 그것을 해결했던 결과, 그리고 하나의 상처를 극복해 낸 과정이 있어야 비로소 도움을 줄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너만의 과정과 결과를 만들어내라.
한번의 바닥을 경험한 자는, 더 이상 그 바닥을 경험하지 않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할 것이다. 인간은 모두 그렇게 생겨먹기도 했다. 힘들고, 아프고, 괴로운 건 다시 겪기 싫어한다. 특별히 그 고통을 견뎌서라도 얻을것이 없다면 더욱이 말이다. 자신의 결핍으로 자기자신이 혐오스러울 정도로 괴로움을 겪어보았다면, 어쩌면 축복할 일이기도 하다. 두번다신 겪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할테니까 말이다. 결핍은, 긍정이 되기 전까진 아무 쓸모도 없다. 계속해서 자신의 결핍을 외면하고, 부정하고만 있는 것은 여전히 부족함을 그대로 안고 가겠다는 암묵적인 동의와도 같다.
결핍을 강점으로 바꾸기 위해 부단히 찾고, 갈구하자. 만일 여전히 결핍을 부족함으로만 느끼고 있다면 어쩌면 당신에게는 자신만의 기준이 세워지기 이전일 수도 있다. 한 사람에게 기준이란 것은, 삶을 나아감의 이유가 되어주기도 한다. '이 정도는 해야해'라는 일종의 강박과도 같은 것은 기준에서 나온다. 기준이 없는 사람은 '오늘 힘들니까 대충 하자'가 된다. 그러나 '나는 매일 글을 쓰는 사람이다' 라는 기준을 세운다면, 몸이 아파도, 술을 마셔도 글을 써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과도 같은 책임감이 생긴다. 그런 기준이 하나씩 쌓여가는 것이 소위 말하는 '꼰대'라고 느낄수도 있지만, 그 꼰대라는 단어또한, 자신만의 정답을 이야기하는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 뿐이다.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며 답을 찾아온 그 사람에겐 그것이 정답이며, 누군가에겐 오답이 될 수도, 정답이 될 수도 있는 것 뿐이다. 내가 써내려가는 이 글도 나만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철학적으로 기준을 하나 정립한 셈이다.
모두의 세계는 다르며, 굳이 이해받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그저 살아가는 이유 하나쯤은 명확히 해두는 것이 이롭다. 그것이 바로 기준이다. 하나의 기준을 못세운건, 아직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이 없어서 그렇다. 치열하게 질문하고 답을 내려보고, 수정해보자. 이미 답은 당신안에 있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 진심으로 노력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