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숙제였어

숙제를 다했나요? 다 풀었나요? 아니요. 또 다른 숙제가 있어요.

by 한이루

참, 살아지는 것은 무엇인가, 이 생은 끊임없이 확장하고 넓혀가야만 함을 필연적으로 느낀다. 고립되지 않게 말이다. 그 시절의 내가 느낀것이 전부가 아니었고, 그럼 현재도 같으리라. 곧 현재 또한 전부가 될 수 없음은 이 한번의 생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복기시켜준다. 어쩌면 마치 정답을 찾은 것 마냥 의기양양 할 수 있음은 여전히 이 생을 잘 모른다는 패기일 뿐이겠다.


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아직 덜 여물어 적당하게, 어쩌면 가장 어려운 따듯한 온기, 그리고 언제든 벌레가 날아들어 잎을 갉아먹기 전에 이미 내 옆에서 나보다 먼저 그 벌레를 지켜보고 있는 존재가 있음을 느끼며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안정감을 배워야 하는 때였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 따듯한 온기 대신 건조하게 깔린 차디찬 공기와 모든 것들이 예측할 수 없는 듯하게 깊은 어두움은 이 세상은 밝은 곳도, 편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형체가 잘 보이지 않는 저 길 끝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다. 그렇게 자신이 서있는 세상과 등을 맞댄채 서로를 선택하지도, 떠나지도 않는다.


아프다는 것이었음을 인식하게 해준 것도 세상이었다. 그 아이는 자신이 겪어보지 못했던 밝은 곳을 경험하고 오면, 시도때도 없이 그 곳을 다녀오길 바랬다. 주말이 되면, 방학이 되면 그 곳을 찾아다니기 일쑤였다. 그렇게 그 아이에게 세상은 떠나고 싶으면서도, 찾아가고 싶은 곳이 되어가고 있었다. 떠나기엔 존재해야 했고, 존재하기엔 이해하지 못하는 그 세상을 마냥 편안한 마음으로 누릴 수 없었으니까. 그 아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점점 질문을 쏟아낸다. '왜 나와 저들은 다를까?' '난 왜 슬플까?' '왜 나의 세상은 이렇게 아픔이 가득 할까?'



그렇게 아이는 처절하게 배워나갔다. 다른 아이가 받는 따듯한 사랑을 받아보고 싶었기에, 사랑의 구조를 해부해야 했고, 다른 아이에게 있는 온기를 느껴본 적 없기에 온기의 온도를 분석해야 했다. 남들은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들이마시는 안정감은 이 아이에겐 치열한 학문처럼 탐구하고 학습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학습이었고, 삶에 끝나지 않는 숙제처럼 괴롭히는 듯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 어른아이는 비로소 알게 된다. 완벽하게 채워진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이 생의 빈 공간을.


부족함 없이 사랑받고 자란 이들은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같은 따듯함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선이기보단, 그저 누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평생을 추위 속에서 떤 사람만이 따뜻함의 정의를 가장 정확하고 사무치게 설명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 아이때에 던진 질문이 훗날 어느 상황에 맞닿아 답이 될 때, 그 때를 겪어본 자의 특권일수도 있다.


배고픔으로 허기를 견뎌본 사람만이 쌀 한 톨의 귀함을 온몸으로 이해하듯, 아이는 자신의 결핍은 이 생에 부족함으로, 결국 이 생에 중요한 것들을 상기시켜주는 배움 삼는다. 쉬운 길은 아니다. 자신의 결핍을 바로보지 못하고, 여전히 그 바다를 유영하며 망망대해 같게만 이 생을 바라보니 말이다. 그 아이는 그렇게 이 생을 배우고, 사람을 배워나가고 있었다.


이제 아이는 자신처럼 그림자 뒤에 숨은 또 다른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 준비를 하고 있다. 한 생에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순간이 무엇인지, 타인에게 건네야 할 온기의 적정 온도가 몇 도인지 뼛속 깊이 안다는 것. 그것은 한 생에 내내 부족함만을 부유하며, 텅 빈 공간을 허우적거려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슬프고도 위대한 특권이었음을 증명하기 위한 때를 기다리며 말이다. 결코 쉽지 않고, 여전히 그 길이 어떤 모습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 과정이 그 아이에게 여전히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한 목적이 남아있더래도, 그것이 숙제라면 풀어야 하니 말이다.


모든 사람에게 숙제는 주어진다고 믿으며 말이다. 그저 나의 숙제는 이것이겠구나 싶은 다짐을 하며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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