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예습 없이 여행을 떠나다.

by 김정옥

어찌어찌해서 영국 노팅엄셔의 소읍 비스턴에서 400일을 살았다.


귀국 날짜를 정하고 한국으로 들어가면서 유럽 어디라도 들러 2주 정도 여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몇 년 전에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으며 포르투갈을 마음에 두고 있었고, 영국과 거리도 가깝고, 스페인 북서부 지방을 함께 여행하기에도 좋고, 때는 바야흐로 이베리아 반도가 한여름의 불같은 더위를 식히고 있는 9월 말이었기 때문에 금방 귀국길 여행지가 결정되었다. 다만 그동안 혼자 계셨던 시어머님과 추석 명절을 지내려고 하니 날짜가 열하루 밖에 안되어 조금 아쉬웠다. 삼일 정도만 더 주어져도 좋을 텐데, 하긴 여행의 날짜는 매번 부족하게 여겨지긴 한다.


출국 한 달 전 저가 국제항공 라이언에어로 버밍엄에서 마드리드 항공편을 예약했다. 그 뒤로는 노팅엄 생활을 정리하느라 여행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고작 1년 남짓 가방 하나 들고 들어와 살았을 뿐이었는데도 정리할 일이 꽤 있었다. 쓰던 물건 중 한국으로 보낼 것들을 국제 수화물로 보내고, 일주일에 한 번 나가던 비스턴 도서관 프로그램 ‘제3언어 사용자 대상 대화방’ 사람들과 작별 행사를 하고, 연간 회원으로 등록하여 다니던 Pure Gym에서 사물을 빼고, 본격적으로 버려야 할 짐들을 리사이클 센터로 실어 나르고, 이 모든 과정에서 물리적인 정리 행동은 물론이고 심리적, 정서적인 정리를 함께 하느라 쉽지 않았다. Tesco, 할렘마트, 오리엔탈 플래시 마트, Boyes, 등 자주 다니던 상점과 매일 걸어 다녔던 거리와 지나다녔던 공원과 인사만 겨우 나누는 사이인 이웃집에도 안녕을 하면서 내가 이 작은 동네를 사랑했구나 생각하는 시간들이었다. 출국 날자가 다가올수록 모든 일이 다시는 올 수 없는 아쉬운 일들로 마음에 새겨졌다.


‘시간’은 무한한 힘으로 모든 것을 통제한다. 그래서 ‘그날’은 언제든지 오고야 만다. 만약 포르투갈과 스페인 북서부 여행이 없었더라면 영국을 떠나는 버밍엄 공항에서 내가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울지 않았고 영국은 내가 떠나는 것에 더더욱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쿨하게 헤어졌다. Good bye UK, good bye Nottingham 그리고 Beeston.


라이언에어 FR2083편 9열 A좌석에 앉아 비로소 Moon에게 ‘그런데 마드리드에서 우리가 어디에 갈 건데?’ 하고 물었고, 물으면서 나는 워낙 유명해서 듣기는 많이 들었는데 스페인의 수도라는 것 말고는 내가 마드리드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행을 준비하는 것은 짐을 싸는 일 말고도 그곳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고 사랑할 준비를 하는 것인데 그걸 하지 못했던 것이다. 버밍엄 공항에서 마드리드로 나가서 포르투갈에 간다는 것 외에 어느 도시에 가는지도 알지 못했다. 두어 주 전에 부킹닷컴을 열고 Moon이 불러주는 도시마다 한달음에 숙소를 예약하긴 했어도 도시 이름들이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게다가 400일 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귀향의 마음으로 새 여행을 시작하는 상황은 또 얼마나 부조화했는지...... 하늘 높이 떠오르고 나서야 확실해진 느낌은 바로 이것. “이번 여행은 완전히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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