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 - 강인한(Resilient) 1
저녁 어스름에 파티마에서 A1 고속도로를 타고 두 시간가량 북쪽으로 달려 포르투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한 밤의 정점이어서 도루강(Douro)을 사이에 두고 포르투와 가이아 지구 신시가지가 서로의 야경을 겨루고 있는 듯했다. 도루 강물은 두 도시의 건물들이 던져 놓은 빛기둥 그림자로 일렁이고 있었고 동 루이스 1세 다리(Ponte D. Luis1)를 건너는 사람들의 행렬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포르투 야경 포인트가 가이야 항구에 몇 군데 있다고 했지만 주차를 하고 다리를 건너면서 본 것으로 충분했다. 거의 200미터가 됨직한 강폭을 한 개의 거대한 아치로 연결한 철제 다리는 1886년 에펠의 제자가 완공했다고 한다. 에펠탑도 그렇거니와 산업혁명시대 철골 구조물이 생각지 못한 강인한 우아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 언더컷 탑노트(undercut topknot) 머리를 한 날렵한 젊은이가 물결 모양의 링, 긴 막대, 둥근 고리 링 등을 가지고 횃불 무술을 버스킹 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전부 순전한 철제 도구들이라 높다란 철골 아치와 어울린다고 혼자 생각했다.
시간이 9시 30분이 넘었는데도 리베이라 거리의 레스토랑들은 저녁을 먹는 사람들로 붐볐고 그 가운데 고급스러운 조명에 이끌려 레스토랑 Avo Maria에 자리를 잡았다. 제법 비싼 가격에 놀라면서도 해산물 스파게티와 스테이크를 주문하고 포트와인도 한 잔 주문했다. 실내의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웨이터들의 경쾌한 움직임을 즐기면서 여행 중 처음으로 제대로 된 디너를 기다렸다. 음식이 테이블에 놓였을 때 이미 소스를 덮은 채로 감자칩과 함께 나온 나의 스테이크에 좀 실망했고 기대했던 포트와인에 조금 화가 났다. 젊은이가 테이블에 세팅 돼있던 와인 잔을 치우고 포트글라스를 놓더니 와인을 1cm 정도 따르고 멈췄다. 더 따르겠지 했는데 그걸로 끝이었다. 포트와인 한 잔에 18유로 정도여서 주문할 때도 망설였는데 원래 양이 이렇게나 적은 것인지 궁금했다.* 그런데 39유로인 Moon의 해산물 스파게티는 지금껏 내가 먹어본 것 중에서 최고의 맛이었다. 그래서 기분을 풀었다. 아직도 버스킹이 한창인 거리에서 밤 산책을 하며 아무래도 포르투가 별다른 산업의 발전 없이 관광산업에만 의존해서 이런가 생각했다. 숙소인 Oca Bom 호텔은 리베이라 지역에서 가까웠지만 밤길에 내비게이션에 의지해 찾아가느라 애를 먹었고 호텔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훨씬 넘었다.
잠들면서 내일은 반드시 걷거나 줄 서서 기다리는 건 하지 않고 포르투의 카페에 앉아 커피 마시면서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이나 하리라 굳은 결심을 했건만. 아침 10시에 문을 여는 렐루 서점(Livraria Lello) 앞에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했더니 이미 10여 명의 사람들이 줄을 만들고 있어 나도 줄을 서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앞 카페에서 Moon을 기다리며 렐루 서점의 동화책 표지 같은 외양을 즐기면 될 것을. 평생 살아온 방식대로 남보다 일찍 와서 아픈 무릎으로 줄을 서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이런 열심병 환자 같으니라고. 그러나 렐루 서점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는 생각이 크게 달라졌다. “이러니 내가 열심히 살 수밖에 없지. 이걸 보지 못하고 밖에서 커피나 마시다가 돌아서는 것은 큰 손해를 보는 거야. 조금 무릎이 아파도 참자, 김정옥”
출입문에서 몇 걸음 들어가자 기둥이 없이 넓게 열린 공간이 사람들을 맞는다. 양쪽 면은 엔틱 목재 서가에 가득 찬 책벽이고 계단 공간을 통해 3층 스테인드글라스 천정을 통해 들어오는 빛 때문에 신비한 마법의 기운이 느껴졌다. 2층으로 올라가는 빨간 계단의 계단참과 Y자로 갈라지는 계단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보였다. 호리병 몸체 같은 우아한 곡선이 굽이치는 계단 구조에 의해 마치 사람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 거대한 코브라의 입천장 속처럼 신비한 모습이었다. 천정과 계단 밑부분은 바퀴 모양 안에 꽃장식이 들어있는 모티브로 조각되었고 서가의 모서리 등 손잡이 하나까지 정교하며 세월의 아름다움을 덧입고 있었다. 실내가 육중한 목재 건축 자재의 느낌이지만 사실은 1900년대의 철근 콘크리트 건축 구조물에 천장과 벽, 기둥에 목재 문양의 석고로 도장을 하고 난간이나 계단 밑면에 목공 디테일을 부착했다. 그것이 바로 관광객이 아무리 몰려들어도 120년 렐루 서점의 계단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이유이다.
J.K. 롤링(J.K.Rowling)이 공식적으로 해리포터를 렐루 서점에서 쓰지 않았다고 발표했을지라도 포르투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무렵에 쓰기 시작했으니 포르투의 미로 같은 골목길과 성당과 함께 렐루 서점에서도 분명히 영감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들 나처럼 생각해서인지 렐루 서점엔 더욱 관광객이 많아지고 입장료는 코로나 시기에 비해 두 배나 올라 10유로이다. 책을 사면 책값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해서 5유로를 더 내고 하드보드지에 아줄레주 문양이 입체적으로 들어있고 뒷면은 사연을 쓸 수 있는 카드이거나 색연필로 아줄레주를 완성할 수 있는 색칠 교본인 정사각형 책을 한 권 샀다. 입장료 제도는 ‘책 사러 오는 사람보다 사진 찍으러 오는 사람이 더 많아진’ 상황에서 렐루가 책 중심의 ‘서점’이라는 정체성을 지켜가려는 정책 중의 하나라고 한다. 서점을 둘러보면서 더욱 그들의 노력을 알 수 있었다. 특정 작가나 작품의 문학세계를 공간으로 구현하여 사람들에게 문학적 경험을 제공하는가 하면 고전문학 작품을 직접 출판하여 에디션으로 판매하기도 한다. 특히 주제 사라마구** 관은 포르투갈 문학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공간으로 인상 깊었다. 렐루 서점은 사진 스폿이 아니라 역시 서점이었다. 또 한편 한강 작가가 생각났다. 영국의 여러 도시와 유럽의 도시의 서점에는 요즘 한강 작가의 작품이 그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서점의 스포트라이트 섹션에 전시되고 있었다. 서울 종로구 서촌 어디쯤에 그가 대표로 참여하는 독립서점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렐루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언젠가는 교보문고 같은 대형서점이나 코엑스 별마당 서점 같은 핫플레이스에 한강 작가의 생애와 작품을 둘러볼 수 있는 별도 공간과 상설 전시형 구조를 가진 작가 전용 문학관이 생겼으면 좋겠다.
* 포트 와인에 대해 나중에 알게 된 사실 : 포트와인 잔은 일반 와인 잔보다 작고, 향을 모으고 높은 도수를 적당히 즐기도록 좁은 형태이다. 잔의 중간 정도 따라 75ml 정도 제공하며 가격은 포르투의 일반 레스토랑이나 바에서는 5-7유로 정도이나 관광지나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20-40유로를 받기도 한다. 사진을 가지고 있는데 내 잔의 포트와인은 20ml도 안 되는 적은 양이었다. 레스토랑 후기에 종업원들에 대한 불만이 더러 있는 걸 감안하면 유쾌한 그 종업원이 동양인 중노년 부부를 골려 먹은 거 같다. 여행지에서는 어쨌거나 노년의 동양인들은 약자가 된다.
**Jose de Sousa Saramago(1922-2010) 1998년에 ‘눈먼 자의 도시’ 등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포르투갈의 소설가이자 언론가. 독재자 살라자르 시절 정치 칼럼을 쓰다가 1966년 문학에 몰두함. 우화적 서술 방식으로 대개 현재의 체제를 전복시키는 역사적 사건을 조명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