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 - 생기넘치는(Vibrant) 5
프라도 미술관에서 예술적 감성으로 세례를 받은 듯 취한 마음을 식혀가며 프라도 산책로를 걸었다. 포세이돈 분수대를 돌아 10여분 만에 마드리드 골든 트라이 앵글*의 두 번째,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에 도착하였다. 여태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티켓 확인이 끝나자마자 지하 1층의 카페 ‘Las Terrazas del Thyssen’로 달려가 Moon은 햄에그 샌드위치를, 나는 ‘하몽 이베리코 콘 판 콘 토마테’를 주문하였다. 살짝 구운 바게트 빵에 막 갈아온 토마토를 펼쳐 바르고 그 위에 붉고 결이 좋은 신선한 하몽을 얹어서 그야말로 한 판을 다 먹었다. 나는 미술관에서의 점심을 정말 좋아한다. 미술관의 카페나 레스토랑은 각각의 인상적인 인테리어를 가진 공간에서 부담스러운 정찬은 아니지만 따뜻한 요리를 착한 가격에 제공해 주기 때문에 미술관을 가면 꼭 점심식사를 하곤 하는데 오늘도 만족스럽게 가장 스페인다운 점심을 먹었다.
Thyssen-Bornemisza Collection은 서양 미술사의 주요 이정표를 모으는 것을 목표로 1920년대 말에 설립되어 창립자(하인리히 티센 보르네미사)가 13세기에서 19세기 초 사이의 작품을 수집했고 그의 아들 한스 하인리히 티센-보르네미사가 작업을 이어받아 고전 거장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1980년대 작품까지 컬렉션의 범위를 확장했다. 처음에는 스위스 루가노의 개인미술관에 보관했지만 공간의 부족과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컬렉션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방안을 찾던 중 스페인 정부의 노력으로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이 1992년 10월 마드리드에서 개관했고 몇 달 후 스페인 정부가 인수함으로써 이 컬렉션은 이후 모든 스페인 국민의 소유가 되었다. 그의 아내 카르멘은 말라가 출신으로 컬렉션이 스페인에 유치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물론 말라가에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개관한 미술전문가로서 남편 사후 지금의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을 있게 한 장본인이다. 0층의 로비 라운지 전시 공간에 스페인 국왕 부부 초상화와 미술관을 설립한 한스 하인리히 – 카르멘 티센 보르네미사 부부 초상화가 있었다.
이 미술관은 외부와 내부의 벽 색깔이 모두 주황과 빨강이 섞인 듯한 테라코타 혹은 번트시에나여서 강렬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준다.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인지라 나는 이 빨강오렌지색 원피스도 한벌 가지고 있다. 프라도 미술관과는 달리 사진 촬영이 가능해서 무수한 걸작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빨강오렌지 벽면이 예뻐서 작품 액자 모서리까지 프레임을 채워 찍지 않고 벽면을 배경으로 멀리서 작품을 찍었다.
월요일 오후의 미술관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지만 티센의 전시 그림 수는 관람객보다 많은 것 같았다. 2층에 르네상스 이전부터 18세기까지의 서양미술사의 주요 흐름이 된 작품들이 수도 없이 빽빽이 전시되어 있어서 처음부터 마음이 바빠지고 카메라에 사진을 담는데 더 열중했던 것 같다.
지오반니 부인의 초상(Domenico Ghirlandaio), 율법학자 사이의 예수(Albrecht Dürer), 수태고지(El Greco),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타리나(Caravaggio) 등 그동안 도판에서 봐왔던 레전드 작품들을 그냥 훑기만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싫었다. 1층에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중반까지의 인상파, 표현주의, 추상미술, 팝아트 등 현대 미술의 흐름을 알 수 있게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오베르의 베세토 마을풍경 (Vincent van Gogh), 의자 앞의 프랜치(Ernst Ludwig Kirchner), 욕조 속의 여자(Roy Lichtenstein), 호텔 방(Edward Hopper), 거울 속의 조지 다이어의 초상 (Francis Bacon) 등 주옥같은 작품들이 즐비했다. 0층에는 메트로폴리스(George Grosz), 석류 주변을 나는 벌의 꿈(Salvador Dalí), 거울을 든 어릿광대(Pablo Picasso), 갈색과 은색 (Jackson Pollock), 재봉틀 앞의 소녀(Edward Hopper) 등 20세기 후반 현대미술 작품들과 카르멘 컬렉션 작품들 -에덴동산(Jan Brueghel) , 제네프의 물레방아(Vincent van Gogh) 마타 무아(Paul Gauguin) , 달이 있는 뉴욕 거리(Georgia Okeeffe)-가 전시되어 있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지만 내가 보았던 영국과 스페인의 미술관에는 전시장 곳곳에 긴 나무 의자가 많아 나처럼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라던지, 하염없이 한 작품과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라던지, 또는 너무 많은 작품 감상에 피로해진 사람들에게 앉을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또 의자가 아니라 작품 앞에 유치원생부터 대학원생까지 현장학습으로 바닥에 앉거나 아예 접이의자를 준비하여 앉아 설명을 듣고 학습을 하는 모습이 많이 눈에 띈다.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흔희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내가 방문하는 날의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에도 작품을 공부하는 팀이 정말 많았다. 한 기업가 가문이 대를 이어 안목을 가지고 미술품을 수집하고 그를 시민들의 손에 돌려주었다. 한스 하인리히 티센 보르네미사 남작이 스페인 정부에 소장품을 넘기면서 당부한 것은 그림이 흩어지지 않게 한 곳에 있게 할 것과 항상 사람들이 오게 할 것이었다고 한다. 내 생각에 그의 유지는 잘 구현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바람대로 빨강오렌지 빛깔의 벽을 가진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은 '모두의 미술관(everyone’s museum)'이 되었다.
미술관을 나와 마드리드 국립도서관까지 걸어가서 보테로의 ‘거울을 보는 여자’와 하우메 플렌사의 ‘Julia’를 보았다. 두 여자는 콜론 광장을 사이에 두고 도로 건너편에 있는데 각자 자신에게 집중하느라 서로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보테로의 친근하고 유머러스한 소녀는 엎드려서 거울을 보며 놀고 있고 하우메 플렌사의 소녀는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 자신의 내면을 보고 있었다. 콜론 광장은 구시가지에서 신시가지로 이어지는 지점으로 콜럼버스 기념비 등을 비롯한 스페인 제국사적 기억이 깃든 곳이다. 이 국가적이고 역사적인 장소의 경직된 맥락을 두 현대 조각가의 매우 다른 작품들이 인간적이고 시민적인 장소로 되돌려 놓은 듯이 느껴졌다. 이런 것이 바로 공공예술의 힘이다. 이제 다음 일정은 저녁 7시 반의 피아노 공연이어서 시간이 남아 호텔로 돌아갔다. Moon은 바로 레티로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고 피곤한 나는 호텔방에서 쉬면서 그동안 보았던 Jaume Plensa의 명상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제일 먼저 그를 몰랐을 때 바르셀로나 카탈류나 음악당 근처에서 ‘Camela’를, 요크셔 조각공원에서 ‘Wilsis’를, 세인트헬렌 탄광부지에서 ‘Dream’을 보았고 오늘은 ‘Julia’를 보았다. 카멜라와 윌시스는 주철을 재료로 하여 검은색이고 ‘드림’과 ‘줄리아’는 흰 대리석이 마감 재료여서 우윳빛이다. 거대한 소녀들의 정면 모습은 ‘크라운 분수**’의 화면처럼 좁은 얼굴 폭에 입체감 있게 십 대 중반의 소녀얼굴을 표현했고 옆모습은 납작한 둥근 원에 귀와 머리 스타일이 소녀스러움을 더하고 있었다. 사실 여행을 하면서 중간에 숙소에 돌아와 쉬거나 하지 않는 터라 한낮의 호텔방이 낯설긴 했지만 나름대로의 새로움도 있었다. 평온하달 지..... 불현듯 며칠 전만해도 지금쯤 저녁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후련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으로 '지금 나는 길 위에 있구나' 하면서 조금 전에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에서 보았던 에드워드 호퍼의 ‘호텔방’의 고독을 아주 잠깐 누려본 것이다.
스페인이라 따뜻한 날씨를 기대했지만 확실히 마드리드는 날씨가 추웠다. 연주회에 갈 때 입으려고 넣어온 반팔 원피스를 꺼내보지도 못하고 경량패딩에 바지를 입고 마드리드 국립 음악당(Auditorio Nacional de Música)에 도착했다. 음악당 건물 외관이 단순해서 주변의 고풍스러운 건축물에 비하니 왜소하게 느껴졌고 주변 분위기도 유럽의 다른 연주회장과는 달리 한산했다. 음악당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으려고 일찍 도착해서 카페테리아를 찾으니 우리가 첫 손님이었다. 카바 와인과 보카디오 데 하몬 콘 토마테(바삭 바케트에 건염 하몬과 토마토를 넣은)를 먹었는데 음식 궁합이 꽤 잘 맞았다. 스페인 카페나 바에서 제일 많이 보이는 타파스여서 오늘뿐만 아니라 여행하는동안 자주 먹게 될 거 같다. 스페인 어느 도시를 가도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하고 활기차 보이는 게 이런 건강한 식재료를 살린 요리들 덕분일 것이다. 간단히 저녁을 마치고 일찌감치 내 좌석을 찾아 앉으니 아직 사람들은 오지 않았고 독특한 관객석 배치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흔히 보는 무대 앞면에만 객석이 있는 형태가 아니라 무대를 중심으로 좌우, 뒤, 약간 위 테라스까지 감싸듯이 배치되어 있어서 마치 장미꽃잎 펼쳐진 중앙에 무대가 있고 그 속에 오늘의 주인공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오늘 연주자는 서른 살이 갓 넘은 폴란드계 캐나다인 Jan Lisiecki로 조성진이나 임윤찬처럼 콩쿠르 출신이 아니라 15세 때 도이치 그라마폰과 독점 음반을 내는 등 일찍부터 국제적 주목을 받고 음악상도 많이 수상했다고 한다. 그가 최근에 전주곡 모음 음반을 냈기 때문에 오늘도 1부에서 쇼팽, 바흐, 라흐마니노프 등의 전주곡을 연주하고 2부에서 쇼팽 24개의 전주곡 Op.28을 연주하였다. 뭐랄까 전주곡이어서 귀에 익숙한 곡이 많아 듣기에 편했고 객석 배치 덕분인지 연주자의 기량인지는 모르겠으나 연주자와 매우 가까이서 감상하는 것같이 음 하나하나가 명료하게 들렸다. 영국의 몇몇 도시에서 가본 클래식 연주회는 항상 만석이었는데 마드리드 국립 음악당은 빈자리가 많았지만 정장을 한 마드리드 시민들이 인터미션에 와인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근사했고 연주자를 향한 몰입도 괜찮은 편이었다. 여행할 때 머무는 도시의 연주회장에 좋은 연주가 있으면 피곤해도 꼭 일정에 넣곤 하는데, 해가 빨리 지는 겨울이나 영국처럼 하루를 빨리 마감하는 나라에서 여행객이 저녁시간을 활용하기 좋다. 하지만 몸이 피곤하다는 것과 스페인처럼 야간에 더 활동적인 도시에서는 밤 시간을 느끼지 못하는 아쉬운 점이 있다. 오늘도 마드리드에서 마지막 밤이라 연주회가 끝나자마자 그랑비아 거리로 갔지만 이미 10시가 훨씬 넘어 쇼핑이나 카페투어를 하지 못하고 거리만 걷다가 숙소에 돌아왔는데도 자정이 가깝다. 정말 고된 반달문 투어***의 3일 차 일정인 것이다.
*마드리드 골든 트라이 앵글: 프라도 거리를 따라 도보 이동이 가능한 세 개의 핵심 미술관이 위치하여 유럽에서 가장 밀도 높은 예술 지구로 평가됨
** 크라운 분수 : 하우메 플렌사가 2004년 시카고 밀레니엄파크에 설치한, LED 스크린에 시민 1천 명의 얼굴이 번갈아 나타나는 참여형 예술작품으로 그를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합류하게 했다. 우리나라에도 그의 작품이 있는데 서울 롯데월트타워의 아레나 스퀘어에 8.5m의 ‘Possibilities’가 그것이다. 2016년에 설치된 공공미술작품으로 그의 대표적인 주제인 ‘글자들의 구름’이 인체 형상을 이루고 있다.
*** 반달문 투어 : Moon이 사장이고 가이드이고 운전기사이고 여행객인 여행사이다. 고객은 오직 퇴행성 관절염을 갖고 있는 나뿐인데 다음에는 친구 부부와 함께 오면 덜 심심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여행경비가 저렴하고 인문학적 여행코스 선택이 뛰어나고 운전도 잘하고 말수 적은 가이드이기 때문에 다소 몸이 고되어도 추천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