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셰린의 밴시(2022)
개봉: 2022년
장르: 드라마/ 코미디
러닝타임: 1시간 54분
감독/각본: 마틴 맥도나
출연: 콜린 파렐(파우릭 설리 역), 브렌단 글리슨(콜름 역), 케리 콘돈(시오반 설리 역), 배리 케오간(도미닉 키어니 역)
영화는 아일랜드 내전이 끝나가는 1923년 4월 1일, 아일랜드의 작은 외딴섬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아일랜드 내전은 그로부터 10여 년 전 아일랜드 독립전쟁의 결과인 영국-아일랜드 조약(Anglo-Irish Treaty)을 둘러싸고 발발한 아일랜드 자유국과 IRA(아일랜드 공화국군) 간의 전쟁이다. 영국-아일랜드 조약은 아일랜드의 불완전한 독립을 의미했다. 이에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는 IRA와 조약을 찬성하는 아일랜드 자유국 사이에서 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치열한 전쟁 끝에 IRA가 힘을 잃으며, 북아일랜드는 영국으로 남았고, 그 아래 아일랜드는 영연방에 속한 국가가 되었다.
지나치게 치열하고 참혹했던 전쟁은 아일랜드 사회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독립을 위해 함께 싸웠던 동료들이 불과 몇 년 뒤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는 참담한 고통을 겪은 아일랜드 국민들은 전쟁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떨었고,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23년 아일랜드 사회 전반은 암울한 폐허였다.
그러나, 영화는 전쟁터가 되어버린 아일랜드 본토가 아니라, '이니셰린'이라는 전쟁조차 찾아오지 않을 만큼 지루하고 작은(가상의) 섬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아일랜드 내전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2023년 한국에 살고 있는 나에게는 하나의 사건이며, 당시를 지냈던 아일랜드인들을 뭉뚱그려 전쟁을 겪은 하나의 군집으로 기억하겠지만, 실제 아일랜드 외딴섬 사람들의 삶에서 전쟁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같은 시대와 공간을 살았던 사람이라도 우리 모두는 각자 하나의 개인으로서 구분될 수 있다.
개인에 대한 존중은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가치 중 하나이다. MBTI와 MZ세대, 요즘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영어이다. 두 용어 모두 개인을 일정한 기준에 의해 구획화된 집단 속에 구겨 넣기 위한 좋은 도구이다. 물론, MBTI는 자신과 상대의 행동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사회학자들이 제시하는 세대 구분은 지나온 시대를 분석하고 나아가 미래 행동 양식을 예측하여 정책 결정 방향에도 도움을 준다. 한 사회를 분석하는 유용한 연구 도구로 사용된다. 그러나, 지나친 집단화와 구획화는 나와 다른, 혹은 다수에 반하는 특징이나 생각을 가진 개인에 대한 폭력이 될 수 있다. 갈수록 작아지는 개인을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노력이 극단으로 치닫는 갈등을 해결할 열쇠일 것이다.
파우릭의 여동생, 시오반 설리는 마을에서 누구보다 지적이고 사려 깊은 인물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 대다수가 그녀에게 던지는 말은 오직 남자나 결혼과 관련된 것들 뿐이다. 그녀는 여성에 대한 인식과 전쟁이라는 불가항력의 상황에 좌절하고 오빠를 보살피며 마을에서의 지루한 시간을 보낸다. 그녀는 지적인 공허함을 채울 수 없는 시대적 배경에 좌절한다.
시대 속 개인은 파우릭과 콜름의 대비로 더욱 부각된다. 같은 상황에서도 두 절친은 전혀 다르게 반응한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에 불현듯 미지의 공포를 느낀 콜름과 달리, 파우릭은 그 시간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인생의 황혼기를 지나는 노인, 콜름은 전쟁으로 끝없는 지루함 속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작곡에 대한 콜름의 열망은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발버둥처럼 느껴진다.
반면, (우리의 모자라지만 착한 친구) 파우릭은 콜름이 느끼는 두려움, 시오반이 느끼는 공허함, 마을의 지루함까지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에겐 돈이나 시간, 명예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의미는 필요하지 않다. 아니, 그런 모든 것이 없더라도 그의 인생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인생이다. 그는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과거를 떠올리지 않는다. 현재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시간을 보낸다. 그들에게 다정함을 건넨다. 술에 취해 소리친 파우릭의 말은 콜름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의 말은 내 마음에도 울렸다.
왜 많은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야 하지? 그 사실이 과연 내 삶을 더 의미 있게 만드는가.
내가 널 기억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면 그만이지.
100년 뒤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모차르트는 지금 우리가 그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하나도 고마워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의 주요한 사건은 단 하나, 가장 친한 친구 파우릭에게 앞으로 말을 걸지 말라는 콜름의 뜬금없는 선언에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 마을에서도 알아주는 두 친구, 파우릭과 콜름은 매일같이 만나 맥주를 마시고 떠들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콜름은 파우릭에게 무의미하고 지루한 대화를 그만하겠다고 선언한다. 말을 걸 때마다, 바이올린을 키는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콜름은 무의미하고 지루한 대화보다 침묵으로 인한 사색과 창작이 여생을 의미 있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 속 마을의 대화는 무의미하고 때로는 시답잖은 농담들이다.
마을 이곳저곳의 이야기들을 원하는 가게 주인과 신나서 떠드는 경찰.
저급한 농담을 떠들어대는 도미닉.
펍의 주인의 말들과 이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옆 손님.
성당에서 신부에게 하는 고해성사마저도 그저 툴툴대는 말다툼처럼 보인다.
전쟁의 폐허와 섬의 지루함 속에 꿋꿋이 남아있는 것은 '대화'이다. 파우릭은 친구의 절교에 스스로가 다정한 사람인지 지루한 사람인지 혼돈하지만, 당나귀 제니의 죽음은 그가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의 슬픔을 위로해주는 친구가 죽자 그는 순수한 분노에 휩싸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에 대한 파우릭의 분노를 누구보다 이해하고 슬퍼하는 이는 콜름이다. 콜름은 당나귀 제니가 파우릭에게 어떤 존재인지, 다르게 말하면 파우릭이 어떤 사람인지를 가장 잘 알고 있다. 동생 시오반마저도 당나귀를 집에 들이는 것을 매우 싫어했지만, 콜름만큼은 제니의 죽음이 파우릭이 자신의 집을 불태울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것을 이해한다. 왜일까? 그가 파우릭과 가장 많은 대화를 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의미하고 지루한 그 대화들.
2023년, 인류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획기적으로 늘려왔다. 그 어느 시대보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가진다. 그런데,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살아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늘었는데, 우리의 삶은 어째서 더 바빠졌을까? 사회가 바쁘게 움직일수록, 우리는 서로에게 점점 더 날 서고 냉담해진다. 반면, 지루하고 조용한 마을은 다정한 마을이 된다. 그리고 이 지루함은 생각의 깊이를 키운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시간이 주어지고, 각자가 생각하는 가치를 향해 삶의 방향을 바꿀 수도,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시간의 수렁 속에서 누군가는 삶의 의미를 애원했고, 누군가는 무의미한 삶에서도 소중한 무언가를 느꼈다. 각자가 살아내는 모든 단 하나의 삶을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