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IT회사, 비개발, 비전공자로 IT 직군에서 살아남기
나는 유통회사의 IT팀 직원이다.
기획자라던가, PM이라던가 하는 직무를 함부로 붙일 수도 없는 애매한 포지션의 3년 차 사원. 10대 내내 웹 디자인을 공부하고는 경영학과에 진학해서, 창업을 2번 (폐업도 2번) 경험하고 대기업 IT팀에 이르렀다. 3년 차쯤 되면 과거 이력에 대한 질문은 듣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종종 묻는 걸 보면 누가 봐도 특이한 이력이긴 했던 모양이다. 이리저리 새기는 했지만 착실히 IT 쪽으로, 그것도 디자인만 파던 나는 취업의 문턱에 서자 수험생 때처럼 포기하고 싶어졌다. 디자인은 하면 할수록 자신이 없어졌고 아무래도 역시 대충 전공을 살려서 아무 회사의 아무 직무나 가자 싶었다. 어린 나이에 취업 첫 시즌을 시작해서 그렇게 초조할 것도 없었을 텐데 성역도 없이 정말 닥치는 대로 하루에 회사 한 군데씩 자소서를 냈다. 그중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원한 UX 직무가 두 군데. 그중 한 곳에 합격했고 여전히 같은 팀에서 근무하고 있다.
성격상 왜 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으면 업무의 효율이 떨어지는 타입이다. 얼마 전에 한 것 같은데 양식만 바꿔서 다시 하겠다는 보고, 장기적인 투자 관점이 아닌 당장의 이익률만 좇는 숫자 놀이 같은 것들. (결국 보고 자료 만드는 게 싫다는 얘기) 페이퍼 워크가 많은 건 어쩔 수 없다지만, 우리 회사의 경우 정도가 심한 편인데 운이 좋게도 담당 업무가 프로젝트가 되며 그런 부담에서는 꽤 벗어났다. 프로젝트라는 업무의 특성상, 같이 일하는 사람이 매번 바뀌어서 적응할 틈도 없이 늘 약간 긴장되고 흥분되는 텐션을 유지할 수 있다. 심지어는 업무의 범위도 불명확하다. 프로젝트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제반 사항을 관리하고, 이슈를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기획도 하고, 입찰도 띄우고, 품의도 쓰고, 종종 스토리보드나 와이어프레임도 그리고, 관련 보고 자료도 만들고, 계약과 정산도 하고, 그룹 내부 감사도 받고, 위에 보고할 프로토타입도 만들고, 개발 완료되면 테스트도 하고(?) 프로젝트 하나를 맡을 때마다 너무 다양한 분야의 일들이 뒤죽박죽이라 나도 업무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다. 막상 나열하고 보니 스타트업에서 일할 때와 비슷해 보이긴 하지만. 전공자가 아니다 보니 업계에 아는 사람이 없어 다른 곳도 다들 이렇게 일하는지는 모르겠다. (제보받습니다)
디자인이나 개발을 전문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의 기본 상식과 경험이 있고 툴을 다룰 줄 안다는 점, 1인 기업을 몇 년 굴려봤다는 점, 스타트업의 흥망성쇠를 경험해봤다는 점, 외주 업무를 맡아본 적이 있다는 점. 특이한 이력은 담당 업무를 설정할 때도 꽤 이득이 됐다. (회사에서 좋아한다는 대충 아무거나 시켜도 중간은 해내는 애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비전공자가 비IT회사에 비개발자로 덜컥 발을 들인 지난 3년간은 말 그대로 샌드위치였다. 쏟아지는 전문 용어와 잊을만하면 터지는 장애, 죽지도 않고 찾아오는 새로운 프로젝트. 나름 1인 기업이니, 스타트업이니 하며 일반 신입들보다 다양한 경험을 쌓아왔다고는 하지만 실전은 달랐다. 유관 부서, 운영팀, 계열사, 외주 파트너사, 프로젝트팀... 수많은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치이는 말단 사원은 샌드위치 그 자체였다.
의사결정권은 하나도 없는 최전방 실무자.
권한은 없지만 일은 해내야 하는 입장은 정말 고역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일단 부딪혀 보는 수밖에. 3년간 는 건 업무 능력이 아니라 요령을 피우는 재주인가 싶기도 하지만, 요령도 실력처럼 만들어야 할 일이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일상을 잊기 전에, 놓치지 않기 위한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