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맛집, 감성 카페 이런 말이 많아진다는 것은, 동시에 우리 사회가 감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감성을 찾고 싶기에, 그렇듯 감성을 찾아다니게 되는 걸지도. 보물 찾기를 하듯.
누구나 바쁘지 않겠냐만은,
아이를 기르는 부모 입장에서는 유독 그 감성이란 녀석을 찾기 힘들다.
이번 여행에서도 그러했다.
여행은 쉬러 가는 것이다.
일하러 가는 게 아니니까 그것이 당연할 것.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이번 가족여행에 앞서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온전히 쉬지 못할 것이라는 그런 불길한 예감. 사실 그건 지난 몇 년 동안의 경험이 말해주는 예감이었을 것이다.
이삿짐 같은 여행 가방에는 혹시 몰라 챙긴 약만 어른용 아이용 포함 11개 정도나 들어있었고 4박 5일 여행 계획서는 일정이 타임별로 촘촘히 작성되어 있었다.
낯선 곳에서 번거로운 일이 생기는 걸 막기 위해 미리 머리 아프게 고민했지만,그렇다고 모든 것들이 편해지는 건 아닐 것이다.
늦은 여름휴가를 가을에 가기로 했다.
장소는 필리핀 보홀.
여행 첫날, 출발부터 피곤하다는 느낌이 강렬히 밀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새벽 2시에 일어나, 새벽 4시에 인천공항에서 좀비처럼 배회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할 수밖에. 혹시나 7시 반 비행기를 놓칠 새라 우리는 그토록 일찍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부치는 캐리어 두 개, 기내용 캐리어 하나, 남편 배낭 하나, 내 크로스백 하나. 짐이 왜 이렇게 많지? 물은 버리고, 배터리 등은 부치는 짐에서 다 빼고. 여권은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소중히 챙기고. 물론 우리 집 아이는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이 많은 짐을 챙기면서 한 손을 꼭 쥔 채로.
잠은 못 잤더라도 신경 써서 할 일은 많았다. 머리가 멍하면 커피를 들이부어서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수밖에. 그런데 커피를 들 손이 부족해서, 나는 커피를 들이켜야만 했다. 커피를 원샷하고 가는 게 진정 여행이던가?
짐을 부치고 면세점에서 산 물건을 찾고, 인천공항 식당 앞에 가서 6시 반 오픈런을 한 뒤 입맛 없다는 아이를 달래 후다닥 밥을 먹이곤 비행기를 탔다. 다행히 이제 초등학생이 된 아이는 비행기가 조금 무섭고, 귀도 조금 아프고, 비행시간 4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조금만 지루해했다. 하지만 그 조금의 순간들에도 역시 부모가 필요했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의 말들에 응해주어야 했다.그나마 조금만 그렇다는 거에 마음속으로 감사와 감격을 하며.
비행기에서 내릴 때는 다시 위의 분주함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외국이니까 긴장감이 더해진 건 덤이고.
공항에서 리조트까지 픽업하기로 한 택시 기사를 찾고 다행히 무사히 리조트 도착. 도착하자마자 예약을 확인하고, 리조트에 짐을 맡겼다.
그 후 시내로 나가 부족한 현지 돈 환전하고, 점심 먹고 (마찬가지로 아이한테 더 먹으라고 달래가며), 위험하니 엄마 손잡고 다니라고 주의 주고, 덥다는 아이 망고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이고, 물과 자외선 차단 지수 높은 (SPF 110) 선크림 등 필요한 물건들을 사들고 리조트에 돌아왔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잊은 건 없는지 수시로 체크하면서.
뭐야,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힘들었는데 아직 오후 2시다. 세상에. 당연한 말인데 나랑 남편은 이미 지쳐버렸다. 물론 필리핀의 더위도 한몫 거들었고.
체크인하고 나서는 짐을 제대로 풀 겨를도 없이 수영하러 가겠다는 아이에게 캐리어를 뒤져 수영복을 찾아 입혔다.
얼굴에 선크림 바르기 싫다는 아이를 달래고 협박해서 선크림 발라주고 짐을 잔뜩 챙겨 리조트 수영장으로 나갔다.
그냥 나갈 순 없는 노릇. 비치백에 선크림, 생수, 핸드폰 충전기, 핸드폰 방수팩, 워터프르푸 책 등등을 가득 넣어 챙겼다.
남편의 손에는 바람을 넣어야 할 튜브 두 개와 아이의 구명조끼가 들려있었다.
아름다운 리조트의 수영장을 앞에 두고, 아이는 즐겁게 수영을 하고, 남편과 나는 아이를 수시로 체크해 가며 물놀이를 즐겨() 보았다. 물놀이는 부모입장에선 절대 편안히 즐길 수 있는 안전한 놀이가 아니다. 수영이 서툰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아이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어느덧 바닷가의 수영장에는 석양이 밀려드는데, 오늘 하루, 아직까지 긴장을 풀어 본 적이 없다. 여행은 쉬러 가는 거라며?
물놀이를 하다 배고프다고 하는 아이를 위해(꼭 먹으라면 안 먹고, 뭔가 먹기 애매할 때 배고프단다), 풀 바에서 치킨과 피자를 시키곤 내친김에 칵테일 한잔과 맥주 한 병을 시켜봤다.
아뿔싸! 1+1이라, 칵테일 두 잔과 맥주 2병이 나왔다. 영어로 직원에게 좀 더 자세히 물어봤어야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모두 먹어치우기로 한다. 일단 애 밥은 좀 먹이고 나서.
날이 어두워져, 리조트와 수영장 조명들이 모두 켜져 반짝일 때까지, 그렇게 비치 의자에 앉아 아이의 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때로는 일어나 아이에게 조심하라고 한 마디씩 하며, 물에 들어가서 아이와 놀아주기도 하며, 남편과 같이 (같이 나란히 앉아있는 순간조차 짧았지만 어쨌든 같이) 술을 모두 마셔버렸다.
술도 다 마셨겠다, 날도 어두워졌겠다, 아이가 행여 감기라도 걸릴세라 물밖로 안 나온다는 아이를 간신히 설득해서 데리고 나와 비치 타올로 꼬옥 감싸주었다.
비치 타올로 덮인 아이의 얼굴이 싱글벙글했다. 즐거웠다는 아이의 말이 고단했던 오늘 하루를 보상해 주는 듯싶기도 했다. 아이 웃는 얼굴이 저녁 수영장 조명 밑에서 유독 반짝였다.
그러나,
여전히 가득한 짐.
튜브 두 개에는 이제 바람마저 빵빵한 상태.
그 성가신 짐들을 남편과 함께 이고 지고, 방까지 3분 남짓한 거리를 걸었다.
밤의 리조트 정원, 나무와 꽃들은 모두 어둠 속에 흐릿한데, 그 마저도 너무 이국적이라 새삼 내가 낯선 곳에 왔구나 싶었다.
번지는 정원의 불빛 속을 걷다가 다리에 살짝 힘이 풀리며 비틀거렸는데, 이제야 술기운이 다리부터 싸르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낯선 새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외엔 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비치 타올로 덮인 듯 얌전하게 소곤거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 낮은 소곤거림이 너무 좋아서 온몸에 솜털들이 하나하나 일어서는 듯했다.
날씨는 덥고 습한데 온몸이 아직 젖어있어서 조금은 서늘한 듯한 몸의 촉감마저 싫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몸의 긴장이 운동화 끈 풀리듯 스르륵 풀린 기분.
이 순간.
이 짧은 순간을 위해 그 많은 번거로움 들을 감수하고 여기에 왔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오로지 이 한순간을 위해.
3분의 감성과, 그 짧은 안온함을 위해서.
그럼 된 거지,
하며 리조트 로비로 입장하는 순간,
다시 나는 아직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며,
다시 분주하게 번거로움의 일상 속으로 들어갔다.
이 글은 그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
아이를 씻기고, 수영복을 조물 조물 빨아 널어놓고, 여전히 배고프다는 아이에게 컵라면 하나 끓여주고, 모든 짐정리를 다 해놓고, 내일 일정까지 확인하고, 여행 비용을 계산하고, 알람까지 맞추어 놓은 뒤 간신히 침대에 누워 핸드폰 메모장에 끄적인 글이다.
덧. 이 글은 보홀 여행의 단상(斷想: 끊을단, 생각상: 생각나는 대로의 단편적인 생각)이자, 단상(短想: 짧을단, 생각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