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chaela Apr 26. 2016

그렇다면 넌 더 강해진게 아닐까?

혹시 네가 읽은 문학 작품들이 널 더 강하게 만든 건 아닐까?

네가 먼저 읽고 나에게 건넸던 <완벽의 추구>를 나는 아직 읽지 않고 책꽂이에 꽃아두었어. 혹여 쪼~금이라도 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늘상 전전긍긍하는 내게 건넸던 책을 너도 기억하고 있겠지.


교실에서 나는 완벽한 교사이고 싶었다. 그러고보니 5년 동안 교단에 서면서 한 번도 준비가 되지 않은 수업을 진행한 적은 없었구나. 교사가 수업을 미리 준비한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 그런데 난 그게 좀 지나쳤던 것 같다. 교재에 나온 내용에 대해서 토씨하나 빼지 않고 공부를 했고, 어느 부분에서 어떤 농담을 할지 미리 준비했고, 논란이 되는 부분에 대해서 아이들이 질문을 하면 어떻게 대답을 할지 미리 생각하며 수업에 들어갔으니까.


덕분에 나는 실수를 거의 하지 않았고, 교원평가에서 그리 나쁜 점수를 받지 않았고, 오류가 없는 시험 문제를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내가 성의껏 매기는 본인들의 점수에 거의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지. 그래서 나는 내가 꽤 좋은 교사라고 한동안 착각을 하고 살았다.


그런데 교단에 선 지 5년이 되던 해에 예고에서 근무하면서 내가 그토록 완벽하게 한다고 했던 준비들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 지, 누구의 입장에서 완벽한 준비였는 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곤 깨달았다. 내가 참 자기중심적인 교사였다는 것을.


예고에서 근무를 막 시작했을 때, 전과 같이 수업을 열심히 준비하는데도 내가 하는 수업이 아이들의 맘에 가서 닿지 않는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다가 2학기에는 내 기준에 완벽한 한 시간의 수업을 만들겠다는 욕심을 버다. 대신 아이들의 공연이나 실기시험 일정을 고려해서 수업을 진행했지.

노래도 이전에는 꼭 수업 내용이나 맥락을 고려해서 미리 생각해 뒀던 것만 들려줬는데,

"애~~~ 쌤은 맨날 쌤이 듣고 싶은 노래만 들어요."

하던 아이들의 볼멘 소리를 듣고 나서는 수업과 전~혀 관계가 없는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었. 아이언의 '독기'까지.


아 그랬더니 욘석들이 내가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어 준다는 것 자체가 좋아서 수업을 더 열심히 듣는 게 아니겠니?그러면서 수업은 더 느슨하게 하는데도 아이들이 더 많은 내용을 받아들이는 게 느껴지더라. 그리고 아이들에게 많이 미안해졌다. 그동안 아이들 보다는 나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업을 하면서 자아도취에 빠져 있던 게 부끄럽고 미안했다.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내가 완벽을 추구하는 동안 얼마나 완벽으로부터 더 멀어지고 있었는지를 깨달으면서, 나는 결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완벽을 추구했던 예전보다 내가 조금은 더 단단해지지 않았나 싶.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친구들과 했던 말이 기억난다.

"간혹 아이들이 나도 모르겠는 내용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 당황스러워서 괜시리 횡성수설 어영부영 대답을 하는 경우가 있어."

"그러게 말이야. 얼마나 내공이 쌓이면 당황하지 않고 '선생님도 모르겠네. 우리 같이 고민해보자. 선생님도 다음 시간까지 꼭 공부해 올게.'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했던 말이 기억난다.


우리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려면 내공이 필요하지 않니?

너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네가 스스로 너의 나약한 부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건, 그만큼 네가 더 강해진 증거일 거라고.

그리고 너의 글을 읽으면서 또 생각했다. 네가 주문했던 것들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내가 변하고 성장했기 때문만은 아니겠다고.

강함을 추구하는 너의 목소리가 다소 지나치게 느껴졌던 예전과 달리, 어느 순간 나의 가슴에 와 닿았을 수 있었던  어쩌면 네가 또 그만큼 공감의 폭을 넓히면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너랑 나랑 좀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등변 삼각형의 밑 꼭지점에 있던 우리 둘이 위에 있는 꼭지점을 향해 같이 한 발 내딛은 거라고 생각하자꾸나.




그런데 말이야

너는 스스로 나약함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나는 네가 성장한 증거라고 말하는 지점 말이야... 그게 네가 읽고 있는 문학 작품들 때문은 아닐까?


나는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내 안에 내재해 있던 감성들이 더욱 생생하게 살아났다고 생각해. 문학이라는 게 언어를 사용해서 대상(현실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감정들)을 구체적인 형태로 만들어 놓는 것인데, 이것을 계속 접하면 예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이 자꾸 보이고 느껴질 수밖에... 그것도 더 생생하게 말이야. 그래서 문학 작품을 지속적으로 읽는다는 건, 문학적 문법에 익숙해 진다는 건 그만큼 우리의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만드는 일종의 훈련이 되는 셈이지.


요즘의 너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로기완을 만났다>를 읽은 네가 어떻게 '탈북자'라는 단어를 무심하게 흘려 들을 수 있겠니? 어떻게 이전과 그저 똑같은 '연민'의 감정을 가질 수가 있겠니? 아무래도 소설을 읽으면서 더 예민해진 감각들이 너 자신에게도 '열려라 참깨!!!'를 외친 건 아닐는지.


자꾸 이렇게 많은 것들을 그냥 지나치치 못하도록 만드는 문학 작품 읽기가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네가 요즘 읽고 있는 소설들을 함께 읽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상이 조금은 더 나아질 거라는 확신은 드는구나. 네가 읽는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사람보다 돈이 더 소중하다고, 나만 잘 살면 되는 게 아니냐고 이야기 하지는 못할 것 같으니까.


교단에서 소설을 가르칠 때, 예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순간적으로 올라와 울컥했던 적이 종종 있었어. 그때 '아.. 서른이 넘어서야 깨닫게 된 이 감정을 나는 지금 주제 땡땡 어머니의 사랑이라며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구나'하고 생각했었어. 그리고 또 '보다 많은 어른들이 문학 작품을 읽게 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조금은 더 이해하기가 쉬워 지겠구나.'하고도 생각했었지.




이왕 문학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학교를 떠난 이유에 대해서도 얘기하는 게 좋겠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학교를 떠난 가장 큰 이유는 누가 뭐라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끊임없이 '기간제'교사로 규정지으며 방어적으로 근무하는 내가 싫어서였다.

그래도 아이들은 진심으로 예뻤다. 그런데 수많은 관계들이 내가 감당하기에는 벅차더라. 나는 아이들의 감정을 오롯이 받아낼 수 있을만큼 큰 크릇은 못 되더라.


그리고 근본적인 이유 하나 더.

"네."라는 대사 하나를 내뱉기 위해서 "네.", "네→", "네↘", "네↗"...  수 백번도 더 연습하던 녀석들의,

임철우의 소설 <사평역>에 나오는 '그녀는 가난을 안다.'라는 구절을 보고 뭐가 그리 멋있는지 "와~~ 진짜 멋있다!!!"하고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현식이의,

감성, 재기발랄함, 창의성을 객관식답안 5개와 서술형답안 몇 줄에 가두고 등급을 나눠야 하는 나의 일에 회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멋쟁이 연영과 우리반 아이들을 보면서 입시 위주의 주입식 교육이 더 편한 나는 좋은 교사는 되기는 글렀다는 생각도 들었.




교직은 나의 솔잎이 아니었다. 나같은 송충이가 요즘은 출판사에서 일하면 새로운 솔잎을 뜯어 먹을 수 있게 된 것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몇 년이 지난 후, 이 또한 내 솔잎이 아니었다고 할 지 모르겠다. 다만 그 때도 나에게 맞는 솔잎을 찾아 나설 용기는 있었으면 좋겠구나.


너랑 나. 우리 함께 욕심 부리지 말고, 남에게 피해도 주지 말고 우리 수준에 맞는 솔잎을 성실하게 뜯으며 살자꾸나!!!

매거진의 이전글 내겐 너무나 따뜻한 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