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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aela Jun 11. 2016

김 미카엘라가  성당에 나가는 이유

오랜만에 쓰는 답장이다. 이 오랜만에 쓰는 답장에서도 나는 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게 될 것 같구나.


인생사는 참 알수가 없는 법이다.

예수믿고 천당가라는 사람들을 정신병자 취급하던 내가 얼마 전 대한민국에서 세례 받기 가장 힘들다는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으니 말이다.

일요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무릎꿇고 하나님 찾는 예수쟁이들을 평생 이해하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던 내가 그 일요일 아침마다 8시 30분까지 성당에 나가 1시간 30분 동안 예비신자 교리수업을 들다. 그것도 1년 반 동안이나.


다소간의 차이야 있겠지만 보통 6개월에서 1년이면 세례를 받는다. 그런데 세례를 주는 것보다 세례 받은 후에도 꾸준히 신앙생활하는 신자를 길러내는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우리 성당의 신부님은 내가 성당에 첫 발을 디딘 지 1년 하고도 꼬박 5개월이 지난 후에야 세례를 주셨다.

주위 사람들에게도 그 기간이 꽤나 길게 느껴졌는지... 친구들은 종종 내게 아직도 세례를 못 받은 거냐고, 군에서는 세례 받는 게 어렵지 않다는데 입대를 하는 게 빠르지 않겠냐며 놀려댔다. 집안 유일의 천주교 신자인 언니(사촌오빠의 부인)는 작년 크리스마스날 당연히 세례를 받을 거라 생각하고 축하 메시지를 보내올 정도였다.


나름 길다면 긴 시간을 준비해 이번에 함께 세례를 받은 사람은 나까지 5명. 그런데 세례 받을 때 굳이 한복을 챙겨 입으라는 법도 없건만 우리 성당 여자들은 세례를 받을 때 주로 한복을 입는 분위기였다.

"나만 혼자 한복 안 입으면 튀지 않을까? 빌리는 비용도 만만하지 않은데, 이참에 한벌 사야 하나? 시집이라도 갔으면 곱디 고운 한복 한 벌쯤 갖고 있으련만 내가 이 나이에 시집도 아니고 세례 받겠다고 한복을 사야겠냐?"

나의 농담 섞인 볼멘 소리를 듣고 너는 단호하게 말했다.

"돈 아까워. 사지마!!! 단 두 시간 입겠다고 비싼 한복을 사겠다는거야? 우리가 월든 읽고 소박한 삶 운운하면서 불필요한 소비 줄이자고 한 게 3년도 안 지났어. 내가 우리 언니한테 말해서 빌려줄테니까 살 생각은 하지도 마."

 

이렇게 해서 네 언니의 한복을 빌려 입고 나는 '미카엘라'가 되었다. 새색시 느낌을 물씬 풍기며 부족한 외모를 한층 업그레이드 시켜줬던 언니의 고운 한복을 입고 나는 '김 미카엘라'가 되었다.




네가 전에 말했던 대로 어째 우리 좀 바뀐 것 같다. 어릴 적 성당을 다녔던 너는 신은 죽었다고 말한 니체를 좋아하고, 어릴 적 예수쟁이를 이해 못하던 나는 일요일마다 성당에 가니 말이다. 그런 네게 내가 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 드리는 이유를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얘기를 하려니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라는 속된 문구가 떠올라 뜨끔하다. 이마에 인호(세례 받은 신자에게 새겨지는 영적 표지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고 한다.)가 새겨진 지 얼마 안 되는 내가 하는 얘기들이 얼마나 주제 넘은 소리가 될 지도 나는 잘 모르니까. 다만, 내가 성당에 나가는 이유를 그저 진솔하게 너에게 전하고 싶구나.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느냐는 질문에

"예. 믿습니다!!!"

철썩같이 대답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사실 창조주의 존재,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이 아직 내게는 없다.   

미사를 드릴 때면, 어쩌면 내게 필요한 게 하느님 아버지보다 제도와 형식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말이다, 나는 남 탓하지 않고 '제 탓이오'라고 죄를 반성하며 시작되는 미사 전례가 좋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 앞에서 죄책감을 털어버리고 뒤돌아서 잘못을 반복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할 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늦잠을 쿨쿨 자던 시간에 죄를 반성하게 되면서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조금은 더 노력하게 되더구나. 다른 사람들 때문에 내가 피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나는 어떤 지에 대해 먼저 생각하게 되더구나.


죄를 반성한 후에는 성경 말씀과 신부님의 강론을 듣는다.

신부님들도 사람이고 때로는 각종 추문과 스캔들에 휩싸인다. 그러나 모든 신부님들은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려 절대자를, 인간을 섬기겠다고 다짐을 하고 대부분의 신부님들은 그 약속을 지키려 애쓰신다. 더 많이 갖기 위해 남을 짓밟으며 가장 높은 곳에 서려고 애쓰는 게 부끄러움이 아니라 미덕인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더 낮아지려 애쓰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게 나는 좋다.  


2016년 미리내 수도원의 사제 · 부제 서품식 (어떤 분이 찍은 사진인지 모르겠다. 이날 서품을 받으신 부제님 어머님께 부탁해서 받았다.)


강론을 듣고는 보편 지향 기도라고 해서 당시의 상황에 따라 세계 평화를 위해, 정치인을 위해, 우리 주위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한다.

누군가는 기도나 하고 자빠졌으면 모든 게 술술 해결되느냐고 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이 시간이 좋다. 돌아와 시리아 난민을 위해 성금을 조금 보태고, 주변에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 더 애써 줄 것 같은 후보에게 투표를 하면서 생각했다. 기도를 하고 자빠졌는 그 시간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우리 행동의 첫걸음이기 때문에 중요한 거라고 말이다.


보편 지향 기도를 드리고 나서는 예물을 준비하고 감사기도를 드린다.

나의 기도는 세례를 받으려고 숙제처럼 시작되었다. 아직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크게 성호경을 긋는 게 왠지 어색하고 쑥스러워 조용히 마음 속으로 읊조릴 때가 더 많다. 먹는 것에 정신이 팔려 기도를 안 하고 먹을 때가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내 앞에 주어진 음식을 감사한 마음으로 먹게 만드는 식사 전 기도가, 밥을 먹은 후에는 세상을 떠난 이들의 평화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식사 후 기도가 좋다. 우리 죽을 때를 생각하게 만드는 주모송도 나는 좋다.


감사기도를 드리고는 영성체를 모시기 전에 서로 평화 인사를 나눈다.

처음에는 모르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평화를 드립니다."하고 나누는 인사가 어색하기 짝이 없어 곤혹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작년, 꼬옥 끌어안으며 낯선 이방인에게도 평화를 나눠주는 포르투갈 사람들을 만나고 온 이후에 이 평화 인사가 많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래서 지금은 서로의 평화를 기원하는 이 시간도 나는 좋다.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믿는 영성체를 모신다.  

나에게 종교는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이면과 삶의 불가해함을 받아들이는 연습 통로인지 모르겠다.

과학과 논리로 따지고 들자면 밀로 만든 떡이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것처럼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또 어디있겠니. 나는 다만, 영성체를 모시면서 모든 것을 과학과 논리와 효율로 따지려는 인간의 오만과 나의 오만을 경계하고 겸손해지고 싶다.


영성체를 모시고 신부님께서 복을 내려 주시면 미사 전례가 끝난다.




"신을 믿으면서 실제 삶은 니체가 말하는 초인처럼 살고 싶어."

신도 니체도 개뿔 모르면서 겉멋만 잔뜩 들어서 내가 너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는 지 모르겠다. 내가 모순적인 사람이라는 게 참으로 잘 드러나는 말이구나.

그런데 나는 그냥 이렇게 좀 모순적으로 살아보련다.


그 종교적 가치와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나는 때로 가톨릭의 보수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교황님께서 내리는 결정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든가,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 것 등을 나는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는 가톨릭의 많은 가르침을 믿고 따르면서 좀 모순적으로 하느님께 동성애자를 보살펴 달라고, 교황님께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시면 그것에 반대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점집을 찾는 우리 엄마도 좀 더 많이 사랑해 달라고 기도할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주 주보에 실린 글의 일부를 옮기며 너에게 쓰는 편지를 마무리하련다.

영혼과 육신의 부활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루터복음교 신자들(83.2%)에게
"영혼과 육신의 부활에 대해 그토록 부정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까"
하고 묻자하고 다음과 같은 대답들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반드시 부활에 대한 견해를 받아들여야만 교회에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 가족과 사랑을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장으로서 교회가 기능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합니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상당 부분은 허구적인 텍스트가 가미된 것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특히 부활에 대한 기술적 내용들은 수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해 큰 거부 반응은 없습니다. 왜냐면 저는 그것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인간이 상기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이야기라고 여겨집니다. 저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이 실재했는지 아닌지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딸의 손을 잡고 함께 교회에 걸어가는 여정이 저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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