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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aela Jun 22. 2016

그래서, 일단은 자세히 보는 연습을 하려고 해.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여러가지 여정 중 하나라 생각하며 성당엘 나갔는데, 천주교는 나를 찾고 내세우는 종교가 아니라 나를 지우고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종교라는 강론을 듣고 고민중이었다. 그런데 네가 전하는 피에르 신부님의 말씀이 위안이 되는구나. 피에르 신부님 말씀대로 일단은 '타인과 공감'하고 '사랑'하는 것부터 배우고 시작해야겠다.


네 편지를 읽으면서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 생각났다.

자세히 보아야 /  예쁘다 //
오래 보아야 /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

 

몇 년 전, '학교'라는 드라마에 나와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시를 너도 알고 있겠지. 당시 나는 드라마 주인공의 사연을 방불케 하는 풍진 사연을 가슴에 안고 질풍노도의 시기를 온몸으로 헤쳐 나가는 아이들과 부대끼며 살았다. 사회에서 소위 '문제아'라 손가락질 받는 아이들도 이 시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누군가와 살짝만 부딪쳐도 미안하다는 말 대신에 욕이 먼저 튀어나와 시비가 붙고, 경찰차를 출동하게 만드는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 보니 그 아이들은 차비가 없어서 학교에 못 나올 때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사랑한다는 말 대신 술주정을 들을 때도, 너랑 나는 상상할 수 없는 폭력을 당할 때도, 그저 "아이 씨팔" 욕을 내뱉으며 버티고 있더구나.


3년을 자세히 보니 "아이 씨팔"에 담긴 그 아이들의 삶의 무게가 조금이나마 느껴지더라. 그리고는 "아이 씨팔"을 입에 달고 다니는 아이들을 뭣도 모르고 손가락질만 했던 게 미안해 지더라. 겉으로는 거칠어 보여도 마음 한구석에 '풀꽃'같이 따뜻한 시 하나를 품고 읊조릴 줄 아는 녀석들이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면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시인의 말을 녀석들을 만나 온몸으로 배웠다.


학교를 떠난 후, 한동안 잊고 지내던 이 시가 요새 부쩍 생각나는구나.




"아... 이번엔 면도가 잘했네."

'쇼미더머니 5'에서 면도와 우태운의 1:1 배틀을 숨죽여 지켜보던 엄마가, 둘의 마지막 대결을 본 후에 했던 소리다. 금요일의 늦은 밤, 옆에 있는 엄마가 당연히 자는 줄로만 생각했던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내일 모레 65살을 바라보는 엄마의 힙합에 대한 자못 진지한 태도때문에 '풋'하고 웃음을 뱉어냈다.


벌써 시즌 5인데, 전에는 이 프로그램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름부터 무시무시한 대회 출연자들의 행동을 개그맨들이 패러디하며 숱한 화제를 뿌릴 때에도 재방송조차 본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불편'했기 때문이다.


장르 불문하고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보는 게 나는 불편하다. 옆에 있는 사람보다 더 잘 하는 것으로 자기를 증명해 보여야 하는 경연이 나는 즐겨지지가 않더라. 일단은 나부터 살고 봐야겠다는 절박함이 간절함이라 해석되는 세계에서, 승자의 간절함에 가려진 패자의 좌절된 절박함이 계속 마음에 쓰여서 마냥 즐길 수가 없더라.


게다가 힙합이라니... '살아 남기 위해'서 '돈을 보여달라'고 외치는 그들의 절규가 나는 무서웠다. 저항정신을 담고 있는 문화장르 중 하나라고 이성적으로 되뇌이면서도, 흐느적흐느적 건들거리며 '디스'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망신주는 그들의 문화가 감정적으로 싫었다.


그런데 말이다. 세 걸음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리모컨을 집기가 귀찮아서 소파에 널부러져 있던 그 밤, 아무 생각 없이 넋을 놓고 '그냥' 보는데도 느껴지더라. 그들의 흐느적거림 뒤에 녹아 있는 땀방울이 느껴지더라.

그들은 건들거리며 '디스'를 하기 위해서 신중하게 비트를 선택하고, 그 비트를 몸에 익히기 위해 수백 번을 연습하더구나. 그냥 즉흥적으로 뚝딱 나오는 줄로만 알았던 가사들이 사실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만들어 낸 것들이더구나.


거친 모습 뒤에 숨겨진 래퍼들의 노력이 힙합의 '힙'자도 모르는 엄마에게까지 전해졌던 것 같다. 엄마는 누가 더 자연스럽네, 우태운이 더 잘생겼는데 마지막 무대가 아쉬웠네, 해쉬스완은 반전 매력이 있네, 쟤는 좀 독특하네 하면서 쌈디도 울고만한 자신만의 심사평을 쏟아냈다.  


여전히 나는 패자의 좌절된 절박함이 마음에 쓰여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불편하다.

그러나 지난 시즌에서 좌절된 절박함에 노력과 준비와 희망의 옷을 입혀 속이 더 꽉찬 절박함을 안고 나타난 이번 시즌 출연자들을 보면서, 나도 조금은 더 쿨 하게 프로그램을 지켜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60넘어 힙합의 세계에 윽 빨려들어가는 엄마를 옆에서 지켜보던 그 밤에 생각했다.

보지도 않고 쉽게 이야기하지는 말자고, 자세히 보지도 않고 쉽게 판단을 내리지는 말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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