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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aela Aug 17. 2016

머릿속에서 더 아름다웠던 플리트비체, 그러나

4년 전, 같이 근무하던 선생님께 '플리트비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들었다. 'ㅍ', 'ㅌ', 'ㅊ'. 하나 건너 하나씩 거센소리를 품은 이름을 발음할 때마다 약간의 리듬이 느껴졌다. 그 리듬이 당김음처럼 내 맘을 잡아끌었는지,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쉽게 잊혀지지 않고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모니터 앞에 앉았다. 커서가 깜박거리는 네이버 검색창에 'ㅍ', 'ㅡ', 'ㄹ'... 자음과 모음을 합쳐 글자를 만들었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이라 쓰고 검색 버튼을 클릭한 후, 마지막으로 '통합검색' 옆의 '이미지' 탭을 누르 화면이 온통 청록색으로 바뀌었다.


4년 전에는 사진이 조금 달랐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을 검색하면 화면이 온통 에매랄드 빛으로 물든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옛날에는 사람의 접근이 어려워서 '악마의 정원'이라 불렸다는데, '악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진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

사진을 보면서, 신비로운 모습을 간직한 이 호수에는 역시 '요정의 숲'이라는 별명이 제격이라는 생각을 했다.

한결같이 아름다운 사진들 중에서도 유독 마음을 끄는 사진이 한 장 있었다. 에매랄드빛 호수를 가로지르는 긴 'S'자 형태의 산책로 사진이었다.



이렇게 사진 한 장에 끌려 선택한 여행지가 플리트비체였다.

이른 새벽, 자그레브에서 플리트비체로 떠나는 버스에 몸을 실으며 생각했다. 오후에는 꿈에 그리던 요정의 숲을 거닐고 있겠지. 나무로 만들어진 인도교에 앉아 에매랄드빛 호수에 발을 담그고 있겠지.  

버스에서 눈을 붙이며 확신했다. 버스에서 내리면 온통 청록색 세상이 펼쳐지리라.


자다가 일어나 얼떨결에 '플리트비체'라는 이름을 듣고 서둘러 내렸다.

플리트비체 버스 정류장에 내렸을 때, 내 눈앞에 펼쳐진 건...


 

온통 눈으로 뒤덮인 하얀 세상이었다.

이렇게 화들짝 놀랐던 순간이 또 있을까? 청록색은커녕 나뭇잎 하나도 보이지 않는 길가에서 한 3분가량을 멍하니 서 있었다. 자는 동안 누군가 나를 차디찬 시베리아 유형지에 끌어다 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스레 큰 사기를 당한 것만 같은 억울함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의 어리석음을 이내 깨닫고는 민망해서 혀를 내두르며 피식 웃고 말았다. 패딩점퍼를 입고 버스에 오르면서도 왜 생각을 못했을까? 추운 플리트비체를 왜 한 번도 생 못했을까? 플리트비체의 겨울을...


굳이 탓을 하자면, 인터넷을 도배하고 있는 청록색 사진들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플리트비체의 겨울 사진을 널리 널리 퍼뜨려 나 같은 피해자(?)가 더는 생기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조금은 갖고 이 글을 쓰는 중이다. 너 같은 바보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국립공원을 자세히 보려면 며칠이 걸린다고 해서 빠듯한 일정을 아쉬워하며 나선 길이었다. 근처 대도시에 숙소를 정하고 잠시 들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이곳에서 최소 하룻밤은 자겠다는 생각으로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갔었다. 그런데 예상 밖의 상황들이 눈앞에서 펼쳐지자 생각이 달라졌다. 사실, '어? 이건 아닌데?' 싶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맘이 들 정도였다.


나처럼 당혹스러워하는 손님이 더러 있는 건지, 정류장에서 가까운 숙소(호텔 플리트비체)에 갔더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캐리어를 무료로 보관해줬다. 얼었던 맘이 녹아내리는 그나마 따뜻한 순간이었다.



짐을 맡기고 호수 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유람선은 운행하지 않았고, 사람도 없었다.

그래도 나를 이곳으로 이끈 'S'자 산책로는 꼭 보고 싶었다.

호수에 발을 담그는 게 웬 말인가? 행여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금살금 걸었다. 반드시 이 한 목숨 부지해 이 '악마의 정원'을 탈출하겠다는 각오로 한 걸음, 한 걸음을 꼭꼭 힘주어 디뎠다.


그리고 드디어 도착했다. 나를 사로잡았던 사진 속 그 장소에...


아무래도 이건 아니지 않느냐는 표정을 연출하며 연기욕심을 좀 부려봄


눈을 씻고 다시 봐도 내가 그리던 모습과 실제 모습의 간극이 너무도 컸다.

그래도 꿈에 그리던 곳인데 바로 돌아서면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아서 아래쪽으로 내려가 'S'자 산책로를 건너봤다.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당혹스러운 마음을 안고, 새하얀 플리트비체를 정처 없이 2시간가량 떠돌다가 시원섭섭하게 노상방뇨를 한 번 하고는 서둘러 이곳을 떠났다.


   


버스가 나타나기는 하는 건지, 나를 몰라보고 지나쳐 가는 건 아닌 지...

떠나는 순간까지 긴가 민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던 그 겨울의 플리트비체.

혹자는 나의 사진을 보고, 설악산에라도 다녀온 거냐며 놀려댔다.


그러나

긴 머리카락 한 올이 끈적끈적한 목덜미에 달라붙어 삐쭉 혈압을 올리는 요즘, 유독 무더운 이 여름밤.

그토록 실망스러웠던 그곳이 간절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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