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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aela Sep 25. 2016

오랜만에 뒷북치는 답장을 보낸다.

너의 편지를 읽고 "그래 모든 것이 더위 탓이다."하는 답장을 쓰다가, 추석 연휴를 맞아 여행을 다녀왔더니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가을이 성큼 찾아왔다.


답장이 너무 늦어지는 것 같다.

늦은 감은 있지만, 내가 쓰던 답장을 보낸다.

다음 답장에는 이번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려나?




무더웠던 2016년 8월의 어느날 보름이에게


정말 더위 탓을 안 할 수가 없는 하루하루였다.

'내용이 머릿속에 쏙쏙 들어온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잊어버린 것도, 스무 날이 넘도록 잠을 설친 것도, 시원하게 맥주 한 잔 하자던 너와의 약속을 뒤로 미룬 것도, 이렇게 답장이 늦어진 것도 모두 더위 때문이었다. 악명 높은 1994년의 더위 뺨치는 2016년 여름 무더위 때문이었다.


모든 걸 더위 탓으로 돌리는 게 버릇이 돼서 "우이씨, 4년 만에 찾아온 올림픽이 이렇게 재미 없는 것도 더위 탓이야."하고 툴툴 거리다 말고 살짝 고개를 갸우뚱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서.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종목인데 올림픽 경기를 집중해서 보고 있노라면, 저마다 사람을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을 하나씩 갖고 있는 게 신통방통하지 않니? 이번 올림픽에서 펜싱 에페 종목도 신통방통한 녀석 중 하나였다.


에페, 플뢰레, 사브르...

평소 같았으면 이런 펜싱 세부 종목 이을 기억이나 하고 있겠니? '사브르'라는 단어를 흘려 들으며 그저 과자나 한 번 떠올리고 말았겠지.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 내리다가 마지막 순간에 컥! 목이 메게 만드는 과자 '사브레'를 떠올리며 군침이나 한 번 흘리고 말았겠지.


그런 내가 나도 모르게 손에 땀을 쥐며 경기를 보고 있더구나.

결정적 한방을 날리기 위한 숨막히는 대치상황. 먼저 공격하고 싶은 욕심과 조급함을 억누르며 상대방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도 싸우는 선수들이 바로 도인들이라 생각하며 경기를 보고 있더구나.


특히, 이번 리우올림픽 에페 결승전에서 박상영 선수의 게임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가 아니었니? 14대 10으로 뒤져 이제는 끝난 게임이라 생각했는데, 내리 5점을 따내며 이룬 승리였다. 마치 내가 금메달을 딴 것 마냥 승리의 기쁨을 함께 즐기는데... 4년 전, 너와 함께 헝가리 바치거리에 있던 순간이 오버랩돼서 김이 빠져버렸다.


너도 기억나겠지? 헝가리 광장에서 굴라쉬를 먹던 그날 저녁이.

음식점에 들어서기 전 우리는 이름모를 클라리넷 연주자의 '아리랑'을 들었고, 해가 뉘엿뉘엿 지는 거리를 바라보며 여행의 고단함을 사르륵 녹여주는 와인을 한 잔 마셨지. 이국땅에서 낯선 밤을 맞이하며 감상에 젖어 있던 우리에게 갑자기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카누나 카약이었나? 정확한 종목은 기억이 안 나는데, 런던 올림픽에서 헝가리 선수가 금메달을 딴 순간이었다. 우리는 그저 그 자리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괜시리 기뻤다. 그리고 그 환호성은 2012년 8월 1일 저녁을 내 평생에 잊혀지지 않을 특별한 날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그 환호성 덕분에 그날 너와 마주했던 저녁이 지금도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니까.



그런데, 이번에 박상영 선수의 금메달 획득 순간을 즐기는데 헝가리 선수의 실망감 어린 얼굴 뒤로 그 광장의 탄식 소리가 함께 들려오는 것 같더라.

그리고 나선 올림픽 경기를 보는 재미가 훨씬 덜 해졌다. 간질간질한 마음으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우리나라 선수들을 응원하던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경기를 보면서도 더이상 긴장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냥 어떤 경기를 보든 이긴 선수의 기쁨과 진 선수의 아쉬움을 동시에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랬더니 또 다른 재미가 생기더라.



여자 육상 5000m 경기.

햄블린 선수의 다리에 걸려 넘어지고도 먼저 일어나 햄블린 선수의 손을 잡아 일으켜 격려해 주는 다아고스티노 선수를 보는데, 내가 응원하던 선수가 금메달을 딸 때보다도 더 큰 감동이 밀려오더구나.


지고도 환하게 웃으며 상대방의 손을 번쩍 들어올려주던 이대훈 선수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더구나. 패자가 인정해야 승자도 더 편하게 다음 경기를 잘 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는, 그가 말하고 보여준 진정한 예의가 그 어떤 금메달 수상 소식보다도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더구나.


4년 후에는 어떤 마음으로 올림픽을 지켜보게 될 지 모르겠다.

다만, 올림픽도, 우리의 인생도 조금은 더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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