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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aela Mar 13. 2016

500만원 까지는    내가 돕는 게 아니야...

이모가 다녀갔다. 20년 만에 리모델링을 해서 환하고 깨끗해진 집에 어울리는 꽃무늬 커피잔을 선물로 놓고 갔다.


대학 졸업 후, 임용고사를 준비하던 나는 한 번도 온전하게 수험생으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조그마한 보습학원에서 강사로 근무하거나 과외를 했다. 내 용돈은 내가 벌어 쓴다고 당당하게 말하기 위해서... 그러면서도 종종 노량진에 있는 임용고사 학원에 등록하기 위해 엄마에게 손을 벌리곤했다.


일반대학원 석사 과정은 논문도 쓰지 못한 채 수료 상태로 마쳤다. 공부를 하는 것보다 행정 조교로 근무하는 게 더욱 중심이 되는 생활이었다. 금수저를 타고 태어났더라면 공부라도 실컷 했을 거라며 가당치도 않은 말로 엄마의 마음을 후벼 팠다. 그저 무엇이든 핑계 거리가 필요하던 시절이었고, 항상 실패에 대한 이유를 미리 준비해 놓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미래에 대한 확신도, 나 자신에 대한 믿음도 갖지 못해 한없이 불안해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나에게 이모가 500만원을 내어주며 말했다.

“나는 네가 항상 마음 졸이고, 결과에 연연하고, 부모님 배려하면서 눈치를 보느라 욕심 못 차리고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이모에게는 당장 필요하지 않은 이 돈이 너에게 마음의 여유를 가져다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뭐가 되었든 이 돈으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봐. 결과는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해봐. 네가 시험에 떨어졌다고 해서 아무도 너를 실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러니 임용고사를 준비하고 싶으면 다른 것은 하지 말고, 이 돈을 쓰면서 온전히 시험에만 집중해 봐.

꼭 공부하는 데 쓸 필요도 없어. 여행을 다녀온다든가 운동을 한다든가... 너를 온전하게 즐겁게 하는 일에 마음 편하게 써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이제 네 돈이야. 네가 쓰고 싶은 대로 써.

갚지 않아도 괜찮은데, 그러면 네가 더 부담을 가질 것 같으니 나중에 이모가 할머니 되었을 때 주면 좋겠다. 이모는 네가 이 돈을 통해서 어느 정도의 돈이 있으면 사람이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또 세상에 돈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도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

      

이모가 부쳐 준 목돈 ‘5,000,000원’이 찍힌 통장을 들고 왈칵 눈물을 쏟았던가..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게 뭔지도 잘 몰랐던 시절이었다. 이 돈을 들고 노량진 학원에 가지도 못했고, 여행을 다녀오지도 못했다. 내 생활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소소하게 돈을 벌었고, 가끔씩 돈이 부족할 때면 엄마에게 손을 벌리는 대신 이모가 준 돈을 쓰고 돈이 생기면 500만원을 채워 넣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거짓말처럼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한 발 잘못 디디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던 불안감 대신, 등 뒤에 이모가 또는 다른 누군가 버팀목이 되어 서 있주는 것 같은 든든함을 느꼈다.




해외 아동 결연을 시작한 게 이때부터였다. 이모가 내 등을 받쳐준 것처럼 나도 누군가의 등을 받쳐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이 때부터 조금씩은 하게 된 것 같다.      


작년 11월, 후원 단체에서 더 이상 아이에게 지원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문자를 받고 혹시 아이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닌 지 걱정스러워 전화를 했더니 아이가 시집을 가게 되었다고 했다. 16살 나이에 시집가는 아이를 축하해야 하는 지, 아닌 지... 10년 동안 편지 한 장을 써 보내지 않았던 무심한 후원자의 가슴이 뜨끔했다. 이담에 혹시 네팔에 갈 기회가 생기면 한 번 만나봐야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던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이의 소식을 듣고, 굳이 내가 갚겠다는 500만원을 마다했던 이모에게 말했다.   

“이모, 이모가 500만원을 나한테 줬던 때부터 해외 아동 후원을 시작했어. 그게 벌써 10년이나 되었더라. 얼마 전에 아이가 시집을 가게 되었다며 지금까지 후원내역을 보내줬는데, ‘2,550,000원’이었어. 나는 항상 그 아이를 이모가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했어. 500만원까지는 이모가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얼마 전에 또 해외 아동 결연을 신청했는데, 이번에는 아프리카 기니에 있는 남자 아이야.”     



이모는 간단하게 한 마디 했다.

“너는 나한테 돈을 정말로 갚았네.




못난이 후원자는 또 3개월이 지나도록 새로 만난 아이에게 옆서 한 장을 보내지 않고 있다. 오늘은 아이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미약한 버팀목이 여기 지구의 반대편에 있노라고.


쌀쌀한 바람이 한껏 여민 옷 사이를 파고들고 날도 흐린 3월의 둘째 주 일요일.

나의 20대보다 더 고단하고 막막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는 헬조선의 청년에게 선배로서 미안한 마음을 담아 500만원을 선뜻 내어줄 수 있는 그날이 빨리 오기를 꿈꿔본다.

자잘한 꽃무늬 커피잔을 앞에 두고 따뜻하고 봄날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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