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trust you!!”
처음부터 패러글라이딩을 할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다. ‘호수의 사이’라는 뜻을 지닌 스위스 마을, 인터라켄에서 사람들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패러글라이딩에 대한 꿈을 꿔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영국으로 입국해서 유심칩을 구매해 스마트한 여행을 하는 수많은 배낭여행객들과 달리, 유럽 대륙의 끝 포르투갈로 입국해서 여행 가이드북과 와이파이에 의존한 채 비효율적으로 배낭여행을 했던 나는, 최근 인터넷 유저 사이에서 유행하는 핫한 아이템을 모르기가 일수였다. ‘○○에서 해 봐야 할 10가지’라든가 ‘○○에 가면 이 물건은 꼭 공수해 와야죠’하는 이야기들은 나와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여기가 강원도 호스텔인가?’싶을 정도로 우리나라 여행객들이 가득했던 인터라켄 백패커스 호스텔에서 이런저런 현지 정보를 들었을 때, 시골에서 금방 서울로 상경한 촌뜨기처럼 우왕좌왕했다. 융프라우요흐에 가서 신라면 먹고, 피르스트에서 바흐알프제까지 하이킹이나 하며 모처럼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야지... 했던 나의 귀를 쫑긋하게 하는 이야기들이 숙소에는 가득했다.
트로티 바이크를 타다가 넘어져서 손을 10바늘이나 꿰매고도 씩씩하게 이탈리아로 가는 짐을 꾸리던 룸메이트가
“그래도 또 타고 싶어요.”
라고 했을 때, 나의 뇌하수체는 반사적으로 ‘트로티 바이크가 도대체 무엇이길래?’라는 궁금증을 담아 아드레날린을 마구 뿜어냈다.
배낭여행객의 무덤이라는 스위스의 고물가를 실감하며 퍽퍽한 빵 한 조각과 바나나 한 송이로 저녁을 때우려던 내게 따뜻한 쌀밥과 김치찌개를 선뜻 내주었던 예쁜 동생이
“저는 여기에 패러글라이딩하러 왔어요. 제 버킷리스트 1순위거든요. 융프라우요흐는 안 올라가도 후회가 없을 것 같은데, 여기까지 와서 패러글라이딩을 안 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요. 저는 안개 걷히고 해가 쨍~ 나면 무조건 달려가서 패러글라이딩 할 거예요”
라고 이야기했을 때, 나 역시 이곳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할 거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빙하가 녹아 만들어 낸 옥빛물을 연두빛 산이 그러안은 모습은, 유람선에서 보기에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경치에 먼발치의 만년설까지 더해진 모습이라니... 나의 마음은 이미 인터라켄의 상공을 날고 있었다.
다음날.
원래 생각했던 대로라면 알스프 산 속에 깊이 안겨있어야 할 나는 인터라켄의 하늘 위를 날고 있었다. 옥빛물, 연둣빛 산, 하얀 만년설, 드문드문 붉은 지붕... 모든 것들이 꿈속에서나 있을 법하게 완벽한 조화를 이뤄 ‘천국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생애 첫 패러글라이딩은 아름다움과 재미를 선사했다.
그러나 이 아름다웠던 눈의 감각보다도 지금 내 몸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은 나의 토실한 몸을 온 몸으로 떠받쳐 주었던 조종사에게 느꼈던 밀착감이다. 마지막으로 발이 지상에서 떨어지던 순간, 바이킹이나 자이로드롭을 탈 때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자유낙하의 공포를 예감하며 조종사에게 외쳤다.
“I trust you!!”
그러나 지상에서 발이 떨어지던 순간, 자유낙하의 짜릿한 불쾌함이 아니라 온 몸이 자연스럽게 구름 위로 둥실 떠오르는 것 같은 안락함과 달콤함을 느꼈다.
토실한 몸이 온전히 조종사에게 얹혀졌을 때는 목숨이 그에게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기가 엄마에게서 느낄 법한 애착을 느끼기도 했다. 그때 또한번 외쳤다.
“I trust you!!”
그러자 조종사가 한마디 대답을 했다.
“Why don't my girlfriend trust me?”
그때는 나의 긴장감을 풀어주기 위해 하는 이야기라 생각하며 웃고 넘겼는데, 돌아와서 종종 인터라켄 하늘에서 조종사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곤 한다.
아무리 못난이를 사랑한다고 해도, 사랑에 빠지는 순간에는 상대방이 백마 탄 왕자님처럼 느껴지게 마련이다.(나만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나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나의 왕자님을 좋아할 것만 같은 착각이 만들어내는 불안은 어쩌면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에로스는
“사랑은 결코 의심과 함께 있을 수 없다.”
고 말한 뒤 프시케의 곁을 떠났다.
결국 사랑은 불안과 의심을 떨쳐내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아닐까?
만약 내가 나만의 백마 탄 못난이를 만났을 때, 불안이 엄습한다면 조용히 그의 무릎 위에 앉아 눈을 감을 것이다. 그리곤 상상할 것이다. 인터라켄 상공에서 나와 못난이 둘만이 패러글라이더 줄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