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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봄 Jan 28. 2022

삶의 시작과 끝을 함께 보는 것

아기 엄마가 할머니를 보내드리며...

그날은 내가 복직하기로 한 날의 일주일 전 토요일이었다. 

그 전날, 할머니를 보러 갈까 했는데 곧 주말이니 토요일에 가자,라고 생각했던 참이었다.

아침 7시,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놀라지 말고 들어, 할머니가 밤중에 돌아가셨어."


아니, 할머니가? 오늘 뵈러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밤중에 돌아가셨는데 나한테 지금 알려주는 거야?


그날은 마침 내가 코로나 백신 2차를 맞기로 되어 있던 날이었다. 그래서 시어머니께서 육아를 도와주러 방문해 계셨다. 어머님께 흥이를 맡기고, 나와 남편은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코로나 시대의 장례식이었지만, 평소에 덕을 많이 쌓으신 덕인지, 많은 분들이 조문을 오셨다. 

할머니는 평소의 소원대로 주무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한다. 


평생 기도하시던 소원대로 그렇게 하늘나라에 가시게 되어, 그리고 육체의 고통을 더 느끼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할머니가 내 곁을 떠났다는 것이 몇 개월이 지난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할머니와 나는 다른 손주들보다 각별한 사이었다. 


아빠가 장남이라서 태어났을 때부터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왔던 나는, 20개월 차이 남동생이 생기면서 할머니가 내 육아의 많은 부분을 담당해 주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항상 나를 업고 다니셔서, 나름 우리 할머니라고 하면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할머니는 내 오자형 다리가, 할머니가 너무 많이 업어서 휜 거라며 미안해하셨었다. 


할머니는 나를 많이 아끼시는 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시고는 했다. 


내가 결혼은 안 하고 해외로 다닐 때면,  할머니는 나에게 얼굴 시커먼 놈 데리고 오지 말라고 하시고, 나는 인종차별이라며 대드는 것이 우리의 대화였다. 


밖에 나가면 별의별 놈들이 다 팔짱 끼고 다니는데, 너는 왜 집구석에만 있냐며 혼나기도 일쑤였고, 내가 미용실에 다녀오면, 그게 돈 주고 한 머리냐며 티브이 보면 웨이브 넣은 머리가 많더구먼, 너는 왜 맨날 쫙쫙 피기만 하냐며 잔소리를 하셨다. 


결혼 전 남편이 집에 처음 인사하러 왔을 때, 할머니는 본인이 첫눈에 반하셨다며 너무나 남편을 마음에 들어 하셨었다. 


내가 결혼을 하던 19년도 가을만 해도 할머니는 정정하셔서 나와 함께 시장을 돌아다니며 내 결혼선물이라며 남편과 나의 겨울 내복을 고르고 선물해 주셨었다. 


내가 임신을 하고, 코로나 19가 시작되었던 2020년.


할머니는 길에서 넘어져 엉덩이뼈가 부러지셨고, 거동이 어려워지셨다. 때마침 터진 코로나 19로 인해 매일매일 출근도장을 찍으며 활발하게 활동하셨던 성당 활동도 못하게 되셨다. 치매가 살짝 진행되고 계셨던 할머니는 매일 만나던 사람들도 못 만나고 집에서만 계시게 되면서 몸이 점점 약해지셨다. 뼈가 붙고 조금씩 걸으실 수 있게 되었다가, 또 넘어지시고, 좀 나았다가 또 넘어지시고를 반복하시다가 집안에서도 휠체어를 타게 되셨다. 


그동안 나는 출산을 하고, 아기를 종종 부모님 댁에 데려갔다. 흥이는 바운서에 누워있다가, 뒤집기를 하고, 배밀이를 하고, 기고, 서고, 걷기 시작했다. 혼자서 양손에 음식을 잡고 열심히 먹다가, 본인 숟가락과 포크로 입에 넣고, 물컵으로 물도 마시면서 점점 성장해 나갔다. 


반면에 할머니는 흥이와 반대로 퇴행을 하기 시작했다. 화장실에서 씻다가 쓰러지셔서, 엄마가 할머니 목욕을 시켜드리고, 옷에 실수를 하시는 일이 자주 생겨서 결국 기저귀를 차게 되시고, 혼자 드시던 식사가 어려워져 아빠나 엄마가 먹여드려야 하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보호자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던 흥이는 점점 하나의 인격체로, 도움 없이 일어나고, 먹고, 마시게 되었는데, 할머니는 점점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없어져갔다.


한 명은 자라나고 있었고, 한 명은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 둘을 함께 지켜보는 일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간의 시작과 끝은 참으로 비슷한 모습이었다.


할머니의 투병생활 동안, 엄마 아빠는 심리적, 육체적으로 쉽지 않은 시간을 버티었다. 두 분 모두 60대 중반의 나이인데, 할머니를 안고, 들고 하는 일부터, 빨래며 청소며 정말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빠의 다른 형제들은 가끔 찾아만 오지만, 매일 24시간 할머니와 함께 하는 두 사람의 어려움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가정요양으로 인한 엄마 아빠의 심적 우울감은 그나마 흥이의 존재로 매일 조금씩이나마 재충전을 할 수 있었으니, 나에게는 흥이의 출산이 엄청난 효도인 것이다.


할머니도 항상 나의 결혼과 출산을 고대해 왔으니, 흥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매일 침대에 누워 보내는 반복되는 삶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셨을 것 같다.


이전에 내가 복직을 망설였던 이유 중 하나는, 부모님께 아기 케어에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미 할머니 케어만으로도 버거우셨던 두 분께, 복직을 이유로 너무 큰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었다. 하지만 딸이 30대 중후반이 되어도 여전히 열성 부모이신 두 분은, 할머니 케어도 하면서 흥이도 봐주시겠다며 한사코 나의 복직을 원하셨던 상황이었다. 육아휴직 도중에 계약 연장을 고민하면서 이런 상황을 회사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내가 복직하는 날, 윗분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중 한 명이 물어봤다. "할머니는 좀 어떠셔요?" 지난주에 돌아가셨다고 말하니 "복직하라고 딱 맞춰서 가셨나 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원하는 복직도 아니었는데, 나는 복직과 할머니를 바꾸고 싶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을까..  


할머니가 복직 딱 1주일 전에 하늘나라로 가심으로서, 엄마는 1주일을 쉬고, 나의 복직에 맞춰 나의 퇴근시간까지 흥이를 봐줄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신기한 타이밍이기도 하지만, 나에게 할머니는 복직보다 훨씬 훨씬 큰 의미였기에, 아직도 그 말은 상처가 되어 가슴에 남았다. 


이제 곧 구정 연휴가 시작된다.


결혼을 함으로써, 나는 이전처럼 구정을 보내지 않게 되었지만, 엄마 아빠는 할머니 없이 맞이하는 첫 명절이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으시다. 아무래도 할머니가 안 계시니, 예전처럼 삼촌들, 사촌동생들이 모두 모이지는 않을 것 같다. 


이렇게 또 한세대가 흘러 가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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