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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헤라디야 Feb 10. 2024

술과 음악이 흐르는 그곳

그들이 노는 법 - 그리고 위대했던 그 강아지

한동안 뜸하던 일이 12월부터 갑자기 많이 들어오면서 한동안 글을 쓸 에너지 자체가 없었다. 오랜만에 접속해 보니 마지막 글을 올린 후로 벌써 두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구나. 프리랜서로서 일감이 많이 들어온다는 건 분명 반가운 일이지만, 한동안 다른 일들은 미뤄둬야만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침에 일어나 고양이들을 챙기고, 일을 하고, 밥을 먹고, 다시 일을 하고, 고양이들과 함께 잠이 드는 생활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나가서 친구들과 음악을 연주했다. 그리고는 다시 집에 돌아와 고양이들과 함께 잠들었다.


지난 주말에는 모처럼 음악 친구들과 진득하게 모여서 놀 기회가 있었다. 반포 쪽에 있는 C의 집으로 분당에 사는 M과 용산구에 사는 내가 찾아갔다. 새로운 곡들을 배우자는 나름 뚜렷한 목표가 있었지만 도착해 보니 C는 와인 한 병을 준비해 놓고 있었고, 나는 에그 타르트와 막걸리(...) 한 병이라는 기묘한 조합을 준비해 갔으며, M은 비싼 기네스를 대여섯 캔이나 사 왔다. 원래는 편의점에서 가장 이상한 하이볼을 골라서 사 오겠다고 했건만 - 예전에 우리는 붕어빵 하이볼의 존재를 알고 한숨을 나눈 적이 있다 - 그 동네 편의점에서는 전혀 괴랄한 하이볼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했다. 역시 좋은 동네에 사는구나, C.


집에 들어서자마자 강아지들이 달려 나왔다. 귀여운 것들. 나는 과거에 도그시팅을 하러 그 동네에 자주 드나든 적이 있어서 유독 그 녀석들이 정답게 느껴졌다. 붙임성 좋은 강아지들은 손님들이 반가웠는지 돌아가면서 찾아와 애교를 떨었다. 은근히 사람을 압박하듯 애정을 요구하는 고양이와는 다른 이 솔직함이라니. 한참을 발발거리며 돌아다니던 강아지들은 한참 후에야 차분해졌다. 예쁜 것들. 강아지들의 곱슬곱슬하고 보들보들 매끄러운 털을 쓰다듬노라니 마음이 저절로 따뜻해졌다. (죄송합니다... 강아지 사진은 없습니다......)


C는 모처럼 집에 사람이 와서 기쁜지 특제 닭고기 커리를 요리해서 따끈하게 데운 즉석밥 세 개와 함께 내놓았다. 그 안에는 먹음직스러운 닭고기 조각과 함께 향신료들이 통째로 들어 있었다. 여기서 향신료라 함은 정향(클로브)과 소두구(카르다멈), 그리고 통 시나몬 스틱을 의미한다. (참고로 계피와 시나몬은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르다고 한다.) 시나몬 스틱을 통째로 넣은 커리라니... 이토록 대담한 맛 내기가 이 세상에 존재했던 것인가? "너처럼 담대하게 커리 맛을 내는 사람은 처음 봤어." C는 그저 웃었다.




통 향신료는 뱅쇼나 짜이를 끓일 때나 쓰는 줄 알았건만. 사진 속의 시나몬 스틱과 소두구, 정향이 통째로 커리 안에 빠져 있다고 상상해 보시면 될 것 같다.


통 향신료들이 목욕을 하고 있는 커리는 강렬했지만 아주 맛있었다. C와 M은 맥주를 마셨고 나는 잠시 갈등하다가 일단 따끈한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정확히는 뭘 마실까 갈등하는 내 모습을 본 집주인 C가 "아메리카노?"하고 나 자신조차 생각 못하고 있던 정답을 맞힌 것이다. 그 집에 갈 때마다 늘 커피부터 얻어 마셔서일까. C가 고급 에스프레소 기계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막 원두를 갈아서 내린 진한 커피는 다소 몽롱하던 정신이 번뜩 들게 해 주었다.


일행보다 늦게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점차 취해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날따라 M은 흥이 나는지 평소보다 더 빨리 맥주를 흡입하며 C에게 기타의 변칙 튜닝을 가르쳤다. 기타는 일반적으로 저음부터 E A D G B E로 조율하는데, 이와 다르게 음을 맞추는 경우를 변칙 튜닝이라고 한다. 특히 그중에서도 D A D G A D 튜닝은 널리 쓰이는데, M은 20년 동안 이 튜닝으로 연주한 경험이 있었다. 처음에는 마구 버벅대던 C는 점차 감이 잡히는지 음악의 흐름에 맞는 코드를 찾아서 연주하더니만, 급기야 아는 노래들을 반주하며 부르기 시작했다. 그 놀라운 적응력이라니.


M은 흐뭇한 표정으로 C가 단시간 내에 병아리에서 봉황으로 진화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누군가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준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젠가 한 친구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그렇게 오랫동안 음악을 연주했는데 질릴 때는 없었어?" 친구는 아주 의한 태도로 대답했다. "음악의 세계는 넓고도 깊어. 언제나 내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무언가가 남아 있지. 그걸 탐험하다 보면 질릴 틈조차 없어." 우문현답이란 바로 이런 것이리라.




나의 악기들. 그날 밤은 아래 쪽에 있는 주황색 바이올린을 데려갔다.


C의 집에 흥겨운 음악이 울려 퍼졌다. 술이 들어갈수록 조금씩 그 가락이 헐렁해졌지만 즐거움은 점차 더해갔다. "이제 노래 화음을 맞춰 보자!" M은 3중 화음을 맞추고 싶어 했다. 세 사람이 화음을 맞춰 가며 노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자신이 어떤 음을 부르는지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래 멜로디부터 잘 알아야 하는데, C와 M은 이 노래들을 어릴 때부터 들으며 자란 반면 내게는 거의 생소한 곡들이었다. 당연히 내 목소리는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C는 계속 나를 다그쳤다. "안 들려. 더 크게! 목소리 키워!"


나만 헷갈리는 게 아니었는지, 아니면 술 때문이었는지, M은 매번 자신이 부를 첫 음을 까먹었다. 그것 봐. 이 노래를 잘 아는 사람도 헷갈려하잖아. M은 연신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 음을 확인했고 나는 그럴 때마다 키득키득 웃었다. 애초에 술이 들어가기 전에 화음부터 맞춰 봤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후회해 봐야 늦은 일이었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멈추기에는 다들 너무 즐거워하고 있었다.


3중 화음 맞추기를 포기한 C는 D A D G A D로 조율된 기타를 들고 아주 청승맞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 남자가 곧 결혼할 예정인 옛 연인의 집에 전화를 거는데, 여자의 어머니는 딸을 바꿔주지 않고 철벽을 친다. 남자는 제발 그녀를 바꿔 달라고 애원한다, 뭐 그런 내용의 노래였다. C는 감정이 과장된 목소리로 슬프디 슬픈 가사를 내뱉었는데, 그걸 듣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트로트로 편곡하면 딱 좋겠다 싶은 그런 노래였다. 이런 건 대체 어디서 듣고 배운 거냐?!




새벽 2시 반이 되고, M은 슬슬 가 봐야겠다며 택시를 불렀다. 분당까지 먼 길을 돌아가려면 한참 전에 떠났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M이 출발하고 나자 C는 아주 뜬금없이 강아지가 하울링하는 걸 보여준다면서 인터넷에서 사이렌 소리를 찾아 틀었다. 아우~~~~~~! 강아지는 반려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새벽 2시 반에 이게 무슨 짓거리야. 방음이 무척 잘 된 집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 가기 전에 몇 곡 더 맞춰 볼래?" "좋지." 우리는 악기를 들고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금세 새벽 3시가 됐다. 이 정신 나간 인간들이라니. "이거 좋다. 지금 녹음해 두자." "지금?" C는 자신의 홈스튜디오를 최대한 활용하고 싶은지 평소에도 녹음 타령을 하곤 했다. 새벽 3시라고 달라질 건 없었다. 우리는 홈스튜디오에 들어가 5분 만에 녹음을 마쳤다. 이제 3시 20분.


"나 그만 잘래." 하품을 연발하던 C가 말했다. "나도 고양이들한테 돌아가 봐야지." 장장 8시간 반에 가까운 대장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고양이들은 침대에서 다소곳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늦은 시각에 카페인과 알코올을 섭취한 탓인지 나는 자다 깨다 하면서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10시 반 무렵, C가 단톡방으로 새벽에 녹음한 파일을 보내왔다. "왜 안 자?!?!?!" "내 말이!" 곧이어 C가 파란색 배낭 사진을 공유했다. M가 두고 간 거였다. "아, XX!!" 한참 후에 일어난 M가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퀵 서비스 불러서 보내 줄게. 걱정하지 마." 반포에서 분당까지의 퀵 요금은 2만 원에 불과했다/이나 되었다. M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퀵을 보내고 돌아온 C가 메시지를 보냈다. "3분간 자리 비운 사이에 강아지가 어제 남긴 에그타르트 다 먹어치웠어. 자기 몸무게의 1/3은 될 텐데..." 참고로 나는 12개 세트를 사 갔고 전날 밤에 우리는 각자 한 개씩 총 세 개만을 먹었다. 아마도 C는 아침 삼아 하나 먹으려고 타르트 상자를 꺼냈다가 식탁 위에 놔두고 나갔다 온 것 같았다. 강아지 혼자서 얼마 어치를 먹은 것이냐... 체중의 1/3은 과장일지 몰라도 1/10은 확실히 넘었을 것이다. 아아, 위대한 견공이여. "조만간 토하겠네. 미리 사과할게. 부디 네 침대에 오바이트하는 게 아니길..."




강아지의 오바이트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날 강아지가 큰 일을 보았을 때 얼마나 거대한 덩어리가 몸 밖으로 나왔는지는 오로지 C만이 알 일이다. 퀵 기사는 일이 많이 밀렸는지 서너 시간 만에 배달을 마쳤고, M는 무사히 문 앞에 놓인 배낭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나는 우리가 새벽에 녹음한 그 파일을 아직 확인해 보지 않았다. 술 취한 상태에서 기록한 뭔가를 맨 정신으로 듣는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데, 내게는 그런 용기가 아직 없는 것 같다.


조만간 (바라건대) 우리는 또 모일 것이다. 늘 요리사를 자처하는 C 대신에 이번에는 동네에서 맛있는 요리를 포장해서 가야겠다. 그 집 강아지에게 줄 간식도 챙겨야겠다. 다만 당분간 C의 집에 에그 타르트를 사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M은 아마도 기어코 괴상한 하이볼을 찾아서 사 올 것이다. 아마 악기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런 우리를 보고 한숨을 푹푹 내쉴 것이다. 음악 한다고 만나서 술판을 벌이다니.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의 명랑한 모임은 (아마도) 계속될 것이다. 부디 이런 밤이 앞으로도 여러 번 찾아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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