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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헤라디야 Feb 24. 2024

이베이로 90년 된 바이올린 직구하기

그리고 8주 간의 피 말리는 기다림

(경고: 바이올린 직구가 지나치게 오래 걸린 이야기를 지나치게 길고 장황하게 서술한 글입니다. 악기에 관심이 없으신 분께서는 지금 뒤로 가기를 클릭하셔서 귀중한 시간을 절약하시기 바랍니다!)


바이올린을 다시 시작한 지도 11개월 가까이 되어 간다. 정확히는 바이올린을 새롭게 다시 시작한 지 11개월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성인이 된 후에 나는 몇 번인가 바이올린을 다시 시작했다. 어린 시절에 배운 이후로 10여 년을 손도 안 대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다시 시작하고 또 그만두기를 여러 번 하다가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거기에는 장기적으로 앓고 있는 우울증의 영향도 있다. 지금도 정신적인 컨디션에 따라 연습 스케줄이 오락가락하니 말이다. 날마다 단 5분이라도 연습을 하라고 하는데, 악기를 잡을 기운 자체가 없는 날도 있다. 정신력으로 나 자신을 다잡아야 하건만. 그렇건만. (한숨 푹푹...)


내가 어려서 음악을 배운 과정은 평범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어린이라면 대부분 거치게 되는 피아노 학원에서 1년, 그보다는 소수의 어린이가 거치게 되는 바이올린 레슨을 3년. 어느 정도의 기본기를 익히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문화에 관련된 일을 하셨고 스스로도 악기를 아주 잘 다루셨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안타깝게도 나는 연주 실력을 수준급으로 끌어올리는 데는 관심이 없었고 좋아하는 멜로디를 연주하는 것만을 즐겼다. 악기를 사 주시고 레슨비를 대 주신 부모님 입장에서는 아마도 상당히 답답한 일이었을 것이다. 음악을 하고 싶으면 직접 악기를 사서 써야 하는 나이가 되어서야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부모님. 감사합니다, 부모님.)




그동안 열심히 활약한 나의 목청 큰 바이올린. 이제는 세컨드 악기가 되었다.


직접 악기를 사서 써야 하는 나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지난 11개월 동안 내가 주로 사용한 악기는 몇 년 전에 바이올린 연주자 친구에게서 무료로 나눔 받은 바이올린이다. 라벨도 없고 딱 봐도 양산형 싸구려 공장제인 이 악기는 상상 이상으로 소리가 좋았다. 언뜻 생각해도 연주를 잘하는 사람이 세컨드 악기로 쓰다가 준 것이니 길이 잘 들었을 것이다. 음색이 까랑까랑하고 음량이 커서 함께 연주하면 평범한 바이올린의 소리는 그냥 묻혀 버릴 밴조 같은 악기와도 합주가 가능했다. (미국의 인형극 프로그램 '세서미 스트리트'의 개구리 커밋이 연주하는 악기가 바로 밴조이다.) 평소에 음색이 고운 바이올린을 연주하시던 한 분은 이 악기를 시연해 보고 '전사 같네요'라는 소감을 남기셨다.


그동안 미국과 아일랜드의 전통 음악을 배우면서 목청이 큰 이 악기를 쏠쏠히 써먹었는데, 그 외의 다른 장르를 연주하기에는 약간 아쉬움이 있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이 악기를 연주하다가 다른 사람들의 바이올린을 손에 잡으면 마치 버터처럼 부드럽게 느껴졌다. '조금만 더' 좋은 악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물론 현실적인 생각은 아니었다. 원래 악기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품질(?)이 조금만 좋아져도 가격이 훌쩍 뛴다. 입에 풀칠하기 바쁜 프리랜서에게 악기에 큰돈을 투자할 여유는 없었다.


물론 사람 마음이라는 게 간사해서, '구경만 하면 괜찮아!'라며 자신을 설득하기 마련이다. 어느새 나는 당근에서 '바이올린'을 정기적으로 검색하고 있었다. 딱히 마음에 드는 악기가 올라오는 건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대리 만족은 되었다. 그러다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이베이에 들어가 'violin'을 검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아, 과거의 나여, 왜 그랬던가.




인터넷으로 악기를 보고 산다고 하면 질겁할 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터넷에 올린 사진 몇 점만으로는 악기를 판단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겉모습만 예쁘고 문제 많은 악기를 떠안게 될 수도 있다. 가격이 상대적으로 낮은 악기를 보고 이게 웬 떡이냐 하고 샀다가는 자칫하면 더 많은 수리비를 떠안게 될 수도 있다.


이렇듯 많은 위험이 따르는 것이 인터넷을 통한 악기 구입이거늘, 나는 인터넷을 통해 여러 점의 현악기를 구입해 보았고, 늘 어느 정도는 행운이 따라 주었다. 그렇게 주문했던 악기들은 현재 태국과 미국, 제주도에서 친구들의 애기가 되어 잘 활약하고 있다. 특히 중국산 바이올린은 우리 기준으로 보기에 가격에 비해 품질이 높은 경우가 더러 있다. 내 경우는 이른바 '뽑기 운'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그래, 구경만 하지 뭐. 구경한다고 다 살 것도 아닌데... 눈호강이나 하는 거야.' 이런 마음가짐으로 시작된 이베이 검색은 곧 헤어 나오기 힘든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흥미로운 매물이 있으면 그 판매자가 올린 다른 상품을 살펴보고, 밑에 나온 관련 매물을 클릭해 보고 하면서 금세 몇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그렇게 수많은 바이올린 매물을 살펴보던 중에 내 시선이 어딘가에 고정되었다.


충동구매를 부른 바로 그 사진


"올드 바이올린, 스코틀랜드산으로 193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 빈티지"


그 옆에는 강렬한 붉은색의 바이올린 사진이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사진 보정을 했겠지만, 그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꽤나 붉은 색상이었다. 예전에 나는 정말 시뻘건 일렉 기타를 소유한 적이 있었는데, 한 친구는 '네 기타는 다른 빨간 기타가 갈색으로 보이게 할 정도로 새빨간 기타구나'라는 말을 남겼다. 그 정도로 나는 붉은색 악기에 마음이 약했다. '만약 바이올린을 새로 들인다면 붉은색 계열로 살 거야'라고 생각한 터였다. 맙소사, 너는 나의 운명인 것은 아닐까? 증명사진만을 보고 소개팅 상대를 고르는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인가?


물론 무늬만 예쁜 쓰레기일 가능성은 분명 존재했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예뻐도 너무 예뻤다. 의외로 경매 시작가 역시 그리 높지 않았다. 아직 경매를 시도한 사람도 없었고, '오퍼(offer)를 받는다'라고 되어 있었다. 구매 희망자가 입찰 시작가보다 더 낮은 가격으로 오퍼를 넣어서 판매자가 받아들이면 그 가격으로 매물을 구입할 수 있다는 뜻이다. 혹은 판매자가 '그건 안 되겠고 얼마까지는 깎아 줄게'라면서 조금 더 높은 가격을 제안할 수도 있다. 양쪽 모두 받아들이면 그 가격에 거래가 진행된다.


밑져야 본전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판매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상품 설명 페이지에 오퍼를 받는다고 되어 있는데 가격을 제안해도 괜찮을까?' 곧 답신이 날아왔다. '어디 한번 말해 봐.' 나는 판매가보다 20-25파운드 정도 낮은 가격으로 오퍼를 넣었다. 잠시 후에 경매 시작가와 똑같은 액수로 판매자가 거래를 제안했다. '경매 시작가보다 낮게는 힘들겠어. 나도 남기는 게 있어야지. 어차피 원래 액수로도 구입할 의사가 있던 나는 판매자의 오퍼를 덥석 받아들였다. 아아, 내가 진정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새 가족을 들이는 일인데 이렇게 즉흥적으로, 충동적으로 해도 되는 건가? 그것도 사진 몇 장만 보고서... 하지만 이미 결정은 내려졌다.


에누리를 해 주지 않았을 뿐, 판매자는 꽤 쿨하고 살가운 사람이었다. 영어를 잘하는구나. 스코틀랜드에 와 봤다고? 스코틀랜드에는 예로부터 바이올린 제작자가 많았어. 우리 형이 어릴 때 친한 한국 친구가 있었는데. 기타 등등. 케이스가 없이 배송해도 괜찮으냐고 걱정하는 내게 판매자는 말했다. '한 번도 깨진 적 없으니까 걱정 마. 잘 싸서 보낼게.' 조금 못 미더웠지만 일단 믿어 봐야지. 설마 깨지기야 하겠어? 그래도 상자에 나무로 된 악기를 케이스도 없이 넣어서 머나먼 이국 땅까지 보내는 게 안전한 일일까? 뭐, 지금까지 잘 도착했다니 괜찮겠지. 그럴 거야.

 



바로 다음날, 악기가 발송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아아,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게 되었구나. 제발 무사히만 도착해 다오. 해외 직구를 하는 사람이 다 그렇듯이,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배송 추적을 했다. 며칠 만에 악기가 영국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는 업데이트가 올라왔고, '도착국을 향해 출발'이라는 아주 반가운 문구가 떴다. 그때가 12월 13일. 이제 1-2주면 받아 볼 수 있겠구나. 관세는 얼마나 나올까. 현악 공방에 가서 점검도 받아야겠지. 악기가 국내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이미 이런저런 생각으로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도착국을 향해 출발'이 뜬 후로 1주일이 지나도록 업데이트가 없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12월은 크리스마스가 끼어 있어서 좀 늦게 올 수도 있으니까. 다음 주에는 국내에 도착할 거야. 2주 경과. 연휴 때문에 배송이 많이 늦나 보네. 뭐 다음 주에는 오겠지. 3주 경과. 이거 판매자에게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배송 예정일이 1월 2일까지잖아.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4주 경과. 더는 가만히 기다리기만 할 수 없었다. 판매자에게 보낼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아직 악기가 도착 안 했고 4주째 상태 업데이트도 없어. 그쪽에서 배송사를 통해 혹시 현재 위치를 추적해 줄 수 있을까?' 판매자는 이미 한참 전에 악기가 도착했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사과를 연발하며 배송사에 확인을 해 보겠다고 말했다. 얼마 후에 좌절이 느껴지는 판매자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놈의 배송사 서비스 센터에 문의하려고 해도 모든 게 자동화되어 있어서 상담원과 얘기할 수가 없어. 조금만 더 기다려 줄래?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그대로 시간은 흐르고 또 흘렀다. 배송 조회 결과는 여전히 '도착국을 향해 출발'에서 멈춰 있었다. 판매자는 간간히 메시지를 보내서 내게 물어 왔다. '혹시 도착했니? 도착하면 알려줘.' 5-6주째가 되자 판매자의 말은 바뀌었다. '아무래도 환불해 줘야겠다. 만약 나중에 악기가 도착하면 그때 다시 결제해 줄 거라고 믿어.' 이 얼마나 양심적인 판매자인가. 나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했다.'아직도 안 왔어? 네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환불해 줄게.'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나는 꼭 올 거라고 믿어.' '너 정말 인내심이 굉장하구나. 지금쯤 잔뜩 화났어야 정상인데...' '화낸다고 악기가 빨리 오는 건 아니잖아.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난 1월 31일. 친구와 만나 늦은 점심을 먹고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 나름 핫플인 곳이라 20-30분 간의 웨이팅 끝에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오래 기다린 만큼 한동안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카톡이 울렸다. 휴대폰 화면을 보는 순간, '오마이갓!!'이 저절로 나왔다.


반갑고도 기쁜 알림 메시지!


'고객님의 우편물이 도착하였습니다.'


낯익은 배송 추적 번호와 함께 간이통관 신청을 하라는 내용의 문자가 와 있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얘가 왜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친구에게 말했다. '너 아주 복덩어리구나!!'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약 7주 동안 악기는 대체 어떤 곳을 헤매고 또 어떤 곳에 처박혀 있다가 이제야 머나먼 한국 땅에 도착한 것일까? 상상이 되지 않았다. 또 다른 친구에게 급히 문자로 이 사실을 알렸다. 친구의 답신은 '그 바이올린 거의 '오디세이' 찍는구나'에 가까웠다. 곁에 있는 친구에게 급히 양해를 구하고 당장 모바일 관세청 어플로 간이통관 신청을 넣었다. 이틀 후인 2월 2일 금요일에 관세를 납부하라는 문자가 날아왔고 이체를 마치자 곧 통관 완료가 떴다. 에헤라디야!!!


안타깝게도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하루만 더 통관이 빨랐어도 그 주 안에 받아볼 수 있는 것을. 그러나 일단 악기가 국내에 도착해서 통관까지 마쳤으니 며칠 더 기다리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이 기쁜 소식을 접한 판매자는 아주 쿨하게 말했다. '난 진짜 사라진 줄 알았는데 너 초능력이라도 있나 보다! 악기가 집에 도착하면 메시지 보내. 네 인내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10% 환불해 줄게.' 아아, 양심적인 스코틀랜드 형제여. 그대를 존경합니다.




12월 9일에 영국에서 부쳤다는데 어찌 이렇게 되었을까? 실종(?)된 기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드디어 기나긴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찾아왔다. 아침부터 집배원님의 전화가 걸려왔다. '거기 몇 층이세요? 국제 소포가 왔는데 홋수가 안 적혀 있네요.' '201호예요. 감사합니다!' 잠시 후, 휴대폰에 우체국에서 보낸 배송 완료 문자가 떴다. 부리나케 뛰쳐나가 문을 열었다. 문 옆에는 언뜻 봐도 반은 걸레가 된 허술하기 짝이 없는 상자가 놓여 있었다. '저 안에다 바이올린을 넣고 해외로 부쳤다고?!?!?!' 이건 쿨함을 넘어 지나치게 무심한 것이 아닌가? '우린 포장을 잘하니까 부서졌을 확률은 없다고 봐도 돼.' 판매자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스코틀랜드 형제,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반 걸레가 된 상자. 악기를 꺼낸 후에 기념 및 증거(?) 삼아 사진을 남겼다.


상자를 열자 돌돌 만 버블랩 비닐 뭉치와 그 옆에 있는 버블랩으로 허술하게 감은 뭔가가 보였다. (오마이갓!!!!) 일단 손으로 대충 잡고 상자 밖으로 끄집어냈다. 다행히 뭐가 부러진 듯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몇 주 전에 지인의 더블베이스가 넘어져 목이 날아간 모습을 보았는데, 감사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듯 손 끝에 들린 물체는 단단했고 한 조각으로 되어 있었다. 이제 버블랩을 제거할 차례였다. 대충 테이프로 고정한 버블랩은 금세 벗겨졌고, 붉디붉은 바이올린이 안에서 나왔다. 드디어 너를 내 품에 안게 되었구나! (여기서 잠시...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감동하기에 앞서 일단 앞판과 뒤판을 자세히 살폈다. 깨진 자국은 전혀 없었다. 두 달 가까운 기간 동안 춥고 건조한 겨울에 야외에 가까운 환경에서 방치된 후 이리저리 내던져졌을 가능성이 높은데도 깨지지 않았다니. 앞판과 옆판이 만나는 부분만 좀 벌어져 있었다. 이른바 '악기가 터졌다'라고 표현하는데, 만약 옆이 터지지 않았다면 앞판이나 뒤판이 깨졌을지도 모른다. 이음새가 벌어지는 정도는 판이 깨진 것에 비해 훨씬 쉽고 저렴하게 수리할 수 있으니 정말 운이 좋았던 셈이다.


옆구리 터진 김밥…이 아니라 옆구리 터진 바이올린


'방금 악기를 받았어!' 즉시 스코틀랜드 형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옆이 좀 터진 거 말고는 안전하게 잘 왔어. 터진 건 근처의 현악 공방에서 쉽게 수리할 수 있을 것 같아.' 스코틀랜드 형제는 자신이 했던 말대로 아주 쿨하게 악기 구입가와 배송료를 합친 금액의 10%를 환불해 주었다. 그 결과 나는 애초에 오퍼를 넣었던 가격으로 악기를 구매한 셈이 되었다. (물론 그 차액은 고스란히 수리비로 들어가게 되는데...)




천신만고(?) 끝에 영국 스코틀랜드의 한 시골 마을에서 머나먼 대한민국까지 도착한 바이올린은 인터넷으로 주문한 새 현과 새 부품들이 도착하자마자 현악 공방으로 옮겨졌다. '좋은 악기 같네요. 얼마에 구입하셨어요?' '우리 돈으로 OO원 정도요.' '아니, 올드 악기를 그렇게 싸게 사셨어요?' (여기서 잠시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본다. 구입 비용을 적게 들인 대신 시간과 감정 지출을 크게 했습니다.) 사장님은 매의 눈으로 악기를 살펴보며 손을 봐야 할 부분을 말씀하셨는데, 대체로 미리 다 예상했던 것들이었다. 뭘 바꾸고, 어떤 부속을 갈고... 네, 네, 해 주세요. 과잉수리는 안 하시는 분이니 그냥 믿고 따라가겠습니다요.


설 연휴가 낀 탓에 수리 기간은 7-8일 정도로 잡아야 했다. 아마도 오랫동안 누군가의 다락방에 처박힌 채로 세상의 빛을 받지 못했을 악기는 공방 사장님의 섬세한 손끝에서 새 생명을 얻었다. (바이올린의 구조가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다음 부분을 건너뛰셔도 됩니다.) 언제 갈았는지도 알 수 없는 낡디 낡은 현은 고급 현으로 교체되었다. 투박하고 거대한 조율용 페그를 제거하고 큰 페그 구멍을 막은 후 새로 구멍을 뚫는 공정을 거쳐 조율이 쉬운 이지펙(기어가 들어간 페그)을 설치했다. 줄을 바이올린 엉덩이(?)에 고정하는 부속인 테일피스도 가벼운 신제품으로 갈고 오랜 세월 동안 닳고 닳아서 얇아진 지판을 통째로 교체했다. 물론 브리지와 사운드 포스트(소리 기둥)도 새것으로 바꾸었다. 터진 곳의 수리까지 합쳐서 악기 자체의 구입 비용보다 더 큰 비용이 지출되었다. 그 밖에도 자잘한 여러 부분의 수리를 받아야 했다.


경매로 올드 악기(제작된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악기)를 구입하는 경우에는 이런 일이 흔하다. 이른바 '복원용 악기'라는 표현도 있다. 일련의 수리를 전제로 하고 판매 및 구입하는 악기이다. '고장 난 제품 싸게 드립니다. 부품만 갈아서 수리 후 사용하세요.' 중고 컴퓨터와 비교하자면 이런 느낌인 셈이다. 물론 그 부분을 고려하더라도 실물을 직접 접하지 않고 연식이 오래된 악기를 주문한다는 것은 특히나 '뽑기 운'이 필요한 일이다. 도박에 가깝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이번에 그런 도박을 한 것은 순전히 지금까지 인터넷으로 구입한 악기들이 대체로 다 쓸만했기 때문이었다. '난 이쪽으로는 행운이 따르는 사람이야' 하는 전혀 근거 없는 자신감, 혹은 오만함.




수리를 마치고 집에 온 바이올린. 겉보기보다 더 많은 곳에 손을 댔다.


결국 수리를 다 마치기까지는 약 보름이 걸렸다. 공정 중에 이런저런 잡다한 문제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사장님은 ‘이렇게 해서 고쳤는데 소리가 별로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드셨다고 한다. 다행히 수리 후에 첫 시연을 해 보는 순간, 그런 걱정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소리가 좋네요.” 물론 수백, 수천 짜리 올드 악기와 비교할 수는 없었으나 나름 괜찮은 소리가 났다. 수리 전과 비교하면 음량도 더 커졌고 음색도 풍부해졌다. 어휴.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열과 성을 다해 수리를 마쳐 주신 공방 사장님께 약소한 선물을 전해 드리고, 점심조차 거르고 작업하셨다고 해서 간식도 주문해 드렸다. 공방을 나서자 어둑어둑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지고 있었다. 당장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왔다. 아아, 보름 만에 드디어 내 손으로 돌아온 악기를 잡고 활을 바꿔 가며 그어 보았다. 객관적 평가를 위해 녹음기 어플을 켜 놓고 이리저리 소리를 내며 이 곡 저 곡 켜 보았다. 평소 익숙하던 많은 것이 새롭고 낯설게 느껴졌다. 새로운 악기를 만난다는 것은 역시 작은 소우주와의 만남이구나. 이제 이 붉은색의 매력적인 우주를 탐험할 일만 남았다.




'이베이로 영국 시골에서 100년쯤 된 바이올린을 사진만 보고 반해서 주문했는데 배송이 8주나 걸려서 미칠 뻔하다가 겨우 받은 이야기'가 쓸데없이 길어진 것 같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8주간의 기다림 끝에 쓰레기 악기를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운빨이 따라주어야 하는 일이기에.


어쩌면 이번 경험에서 내가 얻은 것은 새 악기보다는 인내심과 평정심의 교훈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저녁에 뭔가를 주문하면 내일 새벽까지 문 앞에 배달되는 세상에서 총 두 달 반을 기다려 원하는 것을 얻는 경험은 신선한 것이었다.


기다림과 좌절, 기대, 희망, 인내심, 요행을 바라는 마음(뽑기!!!)이 버무려진 이 시기는 드디어 막을 내렸다. 이제 신나게 연주하고 또 자랑할 일만 남았다. 당분간은 참 신나겠다. 물론 나의 깽깽이 소리를 고스란히 들어야 하는 같은 건물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마음도 없지는 않지만. 열심히 해서 고문보다는 즐거움에 가까운 연주를 해 보겠습니다. 언젠가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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