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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헤라디야 Mar 04. 2024

이제는 괜찮다는 기분 좋은 착각

만성 우울증, 너의 엉덩이는 왜 이리도 무겁니?

7-8년 동안 만성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정신과에 다니기 시작한 지도 어언 1년 반이 넘었나 보다. 길고도 짧은 18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평균 약 1달에 한번 꼴로 병원에 가서 꼬박꼬박 약을 받아 왔다. 현재 아침 약 2알, 저녁 약 4알을 꾸준히 복용하고 있다. 깜빡해서 아침이나 저녁 약을 복용하지 않은 날은 지난 1년 반 중 약 7-10일가량에 불과하니 약 복용에 있어서는 꽤나 근면(?)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의외로 약 복용을 깜빡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신다고 했다. 내 경우는 출퇴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침이 대체로 여유롭고, 그래서 약 복용이 늦어지기는 할망정 복용 자체를 건너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처럼 열심히 약을 복용한 대가는 일상의 일부를 누릴 수 있는 에너지와 대체로 감정적인 기복이 크지 않은 하루하루이다. 날마다 아주 간단한 끼니를 직접 챙길 수 있고, 늦지 않게 마감을 할 수도 있다. 부담 없이 외출을 할 수 있고,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나름 즐겁게 흘러간다. 예전에는 하루 이틀 외출하면 며칠간 앓기도 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그냥 나의 우울증을 구성하는 특징 중 하나려니 하고 넘길 뿐이다. 약을 복용하기 시작한 후로는 확실히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다. 정말 감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오늘 병원에서 타 온 8주치 약. 두 달 동안 잘 부탁해!


비록 내게는 아직 청소를 하거나 제대로 된 요리를 만들 정도의 기운이 없지만, 일상의 일부나마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 드물기는 해도 어떤 날은 잠에서 깨면 기분이 좋다고 느끼기도 한다. 상쾌한 아침을 보낼 때, 외출해서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공유할 때, 또 예정보다 일찍 마감을 할 때마다 나는 잠시나마 우울증이 내 심신을 떠나고 있다는 기분 좋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착각이었다. 최근에 그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된 계기가 있다. 2-3달가량 바쁘게 일을 하다가 일정이 전혀 없는 며칠간을 보내게 되면서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다운되었다. 약을 복용하기 전에 버금가는 경험이었다. 이렇게까지 우울함이 나를 장악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달리 말하면 1년 반 동안 그런 경험이 거의 없었다는 뜻도 된다.)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느껴졌고, 몸이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내 심신은 말 그대로 우울증에 짓눌린 상태였다.


작년 하반기에 약을 증량하면서 집에서 라면을 끓이고 원초적인(?) 파스타를 만드는 등의 지극히 간단한 식사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또다시 그런 일들조차 버겁게 느껴졌다. 고양이 화장실을 치우는 것만 해도 에너지가 많이 들었다. 단톡방에서 내 메시지에 오랫동안 아무도 답을 하지 않으면 왕따라도 당하는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졌다. 실제로는 다들 바쁜 일상 속에서 자신의 일에 충실하느라 답신이 조금 늦어진 것뿐인데도. 침대에서 보내는 시간이 무한정 길어졌다. 밤에는 공허하고 허탈한 마음을 달래느라 지인의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보다가 잠들곤 했다.


물론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이처럼 우울증이 한동안 심해지는 일은 흔하다. 그 계기는 다양하다. 때로는 아주 사소한 일이 계기가 되어 우울증이 갑자기 심해지기도 한다. 또 언뜻 그 이유를 찾기 힘든 경우도 있다. 문제는 우울증이 심해졌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아차리기까지 의외로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며칠간, 심한 경우는 몇 주간 괴로워한 후에야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도 한다. 때로는 증상이 약해진 후에야 깨닫게 되기도 한다. 정말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우울증 증상이 심해졌다는 사실을 스스로 자각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일단 자기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더 친절하고 관대해질 수 있다. '넌 틀렸어. 아무것도 못 할 거야. 아무도 네게 신경 쓰지 않아. 이런 상태가 영원히 계속될 거야.'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영원한 건 없어. 언젠가는 나아질 거야. 널 아끼는 사람은 많아. ㅇㅇ가 네게 베풀었던 친절을 기억하니? 지난주에만 해도 ㅁㅁ와 함께 즐겁게 수다를 떨었잖아. 다시 그럴 수 있어. 너무 자책하지 마. 네가 이렇게 느끼는 건 네 탓이 아냐.'


또 하나 좋은 점이 있다면 뭔가 실제로 도움이 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햇볕을 더 자주 쬔다든지, 억지로라도 외출해서 몸을 움직인다든지, 사람에 따라서는 병원에 가서 잠시 약을 증량해 달라고 요청한다든지. 이런 조치를 취하면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으며, 우울증 증상을 더 빨리, 조금이라도 더 경감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맛있는 인도 요리와 홍합밥 정식. 먹는 순간은 좋았지만 장기적인 기분 보정(?) 효과는 없었다.


물론 모든 방법이 똑같이 효과가 있는 건 아니다. 기분이 크게 가라앉는 걸 느끼고 혼자 외출해서 맛있는 인도 음식을 포식하기도 하고, 또 엄마와 만나 맛있는 홍합밥 정식을 먹기도 했지만 그다지 큰 효과는 없었다. '그래 봐야 뭐 해'하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다. 많이 걸어 보기도 했지만 기분은 제자리였고 몸은 여전히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효과가 있었을까?


내 경우는 친구들과 함께 음악을 연주할 때 큰 효과가 있는 것 같다. 긴 주말에 사흘 내내 친구들과 만나 음악을 연주했더니 기분이 전반적으로 가벼워졌다. 집에서 혼자 악기를 연습할 에너지가 없을 때라도 일단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만나면 신기하게도 힘이 난다. 아마도 함께 음악을 연주하는 행위를 통해 타인과 이어짐을 느끼고, 또 타인의 에너지를 받기도 하면서 우울증이 잠시나마 완화되는 효과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내가 친구들과 음악을 연주하면서 효험(?)을 본 것처럼 어떤 사람은 독서 클럽에서, 또 어떤 사람은 운동 동호회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치유 효과를 누리지 않을까. 이런 사회적인 활동을 통해 우리의 마음은 다른 사람들과 춤추며 어울린다. 잔뜩 짓눌린 채 웅크리고 있던 마음은 타인과의 교감을 통해 저도 모르게 기지개를 펴고 크게 숨을 들이켠다. 누군가와 이어져 있다는 느낌은 네가 이 세상에서 오로지 혼자이며 아무도 네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우울증의 거짓말에 맞서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의 인식과 생각은 상대적이다. 우울증에 걸리기 이전의 나는 무리 없이 집을 청소하고 요리를 했으며, 친구들을 자주 초대해서 놀곤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라면을 끓일 수 있고 친구들을 만나러 외출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잠시 '정상'으로 돌아온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이번처럼 갑자기 우울증 증상이 심해질 때마다 나는 다시 한번 실감한다. 우울증은 정말 엉덩이가 무거운 손님이고, 아직 내 마음의 거실 소파에 진득하게 앉아 나를 끌어내리려 시시 탐탐 시도한다는 걸.


하지만 우울증이 교활한 불청객이라면 나 역시 더욱 똑똑하고 현명하게 맞설 수 있을 것이다. 가끔은 놈의 기습에 당한 줄도 모르고 한동안 시달리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그런 시기도 언젠가는 지나간다. 그리고 내가 대처하기에 따라 그렇게 되기까지의 시간은 더 단축될 수도 있다.


다만 기억할 점이라면 우울증과 맞설 때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자신에게 친절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울증은 '타인과 이어진 느낌' 못지않게 '나 자신과 이어진 느낌' 앞에서 그 힘을 잃으므로. 우울증 증상이 심해져서 온종일 아무것도 못 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 보는 것은 어떨까. '오늘도 수고 많았어. 언제까지나 이렇게 힘들지는 않을 거야. 넌 강하고 이겨낼 거야. 난 영원히 네 편이야. 함께 이겨내 보는 거야.' 처음에는 빈말처럼 느껴지더라도 괜찮다. 계속 말하다 보면 어느새 진심이 될 것이고, 우울증과의 싸움은 조금이나마 더 수월해질 것이다.


당신에게는 즐겁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충분하고도 넘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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