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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헤라디야 Oct 11. 2023

메로나는 없어도 괜찮아

집돌이 집순이 회동은 집에서

아침부터 상쾌한 공기가 얼굴을 어루만지는 공휴일 전의 일요일. 어떤 부지런한 영혼들은 일찍 일어나 등산이라도 갔을 법한 날씨. 나는 고양이털 투성이의 침대에서 느지막이 눈을 떴다. 오늘의 주된 목적은 절친의 집을 방문하는 것. 약속 시간은 약 1시경. 1시라고 정확히 시간을 정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준비에 따르는 서로의 스트레스를 덜기 위해서였으리라. (네, 맞아요. 본의 아니게 INFP들의 모임입니다.)


흐물흐물한 고양이들과 함께 흐느적대며 시간을 보내다가 정오를 20분 남기고 배달 앱을 켰다. 근처의 직화구이 요리 집에서 닭고기와 새우 요리 세 개를 주문했다. 그 집 음식을 처음 먹었던 날 나는 '이렇게 맛있는 게 세상에 있구나...'라고 느꼈었다. 그날 보기로 한 절친의 애인은 내가 그 집에서 사 가는 새우 요리를 그렇게 좋아했다. 주문하는 순간부터 '고마워요^ㅠ^'라는 말이 머릿속에 울리는 듯했다. 음식이 도착하자마자 바리바리 싸서 들고 택시를 불러 절친의 집으로 향했다. 택시를 탔다는 말만 꺼내도 '부자세요?'라는 질문부터 듣게 되는 요즈음 세상에 버스 대신 택시를 택한 건 음식 용기 세 개가 든 비닐봉지가 찢어질 듯 간당간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말로! 물론 군침을 자극하는 음식 냄새로 다른 승객들을 고문하기 싫다는 생각도 있었다. 8시쯤 통닭 냄새가 풍기는 버스를 타고 귀가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해할 거다. 집콕에 재택 프리랜서인 나도 그런 경험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그 덕분에 맛있는 냄새의 피해자(?)로 선정된 카카오 기사님의 차에 몸을 싣고, 닭과 새우, 나는 달리고 또 달렸다. 수많은 역과 수많은 나무, 수많은 아파트. 죄송합니다, 기사님. 배고프게 해서 죄송합니다. 혹시 물어보셨다면 어디 붙어 있는 식당인지 알려드렸을 거예요.


삐삐삐삐삐삐삐삣. 삐삐삐삐삐삐삐삣. 택시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에 올라가서 키패드에 암호를 두 번이나 눌렀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오랜만이라 기억력이 잘못됐나? 똑, 똑. 문을 두드리자 친구 애인이 나와서 반갑게 문을 열어 주었다. (어쩌면 내가 아니라 새우를 반긴 것인지도 모른다는 자격지심은 제쳐 두고.) 휴가 때 쓰던 비밀번호에서 아직 도로 바꾸지 않았단다. 우리 셋은 인사를 나누기가 무섭게 테이블 위에 닭고기와 새우를 차려 놓고 생전에 평생 쫄쫄 굶다가 닭다리 한 입을 갈망하며 죽은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수저를 놀렸다. 직화로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닭과 새우는 우리 눈앞에서 조금씩 사라져 갔다. 열 마리씩의 새우와 테리야키 소스를 뿌린 큼지막한 통살 닭다리는 결국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취를 감췄다. 뱃속은 풍선처럼 빵빵하고 머릿속은 종잇장처럼 팔랑팔랑해진 세 인간과 옆에서 간절하고 촉촉한 눈동자로 지켜보던 강아지 한 마리는 하나같이 지쳐서 소파에 쓰러졌다. (죄책감을 유발하는 눈빛으로 계속해서 사람 음식을 구걸하던 강아지는 결국 실수로 바닥에 떨군 당근 한 점밖에 먹지 못했다.)


행동 불능 상태가 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보고 싶은 프로그램?' 친구가 물으며 TV 화면을 밑으로 내렸다. '이거, 이거 재미있어.' 내가 선택한 건 외계인들이 나오는 괴랄한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냥 좀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괴랄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모이면 먹고, TV를 보는 지극히 정상적인 현대인의 활동 수순을 따르게 되었다. 한때는 공연도 자주 보러 다녔건만.


나는 우정에도 허니문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절친과 내가 처음 친해졌을 때, 우리는 온갖 공연을 보러 신나게 돌아다녔다. 주로 클래식, 어쩌다 한 번씩은 재즈. 정말 피곤한 줄도 모르고 열심히 공연장을 돌았다. 한 번은 친구가 좋아하는 곡을 보려고 대전까지 내려간 적도 있다. 그렇지만 요즈음의 만남은 주로 비슷하게 이뤄진다. 내가 친구와 친구 애인이 사는 집으로 찾아가고, 음식을 가져가거나 친구가 요리를 한다. 배가 터지도록 먹고 난 후에 반 식물 상태가 되어 TV로 뭔가를 본다. 가끔은 '이게 전부야?'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 건 평화로운 일상의 가치를 무시하는 발언인 걸까? 이따금씩 나는 절친과 더 많은 활동을 함께하던 시기가 그립다. 그렇지만 지금 이것도 나쁘지 않다. 우울증의 여파로 돼지 놀이터가 된 집은 여전히 손님을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내게 좋은 사람들과 함께 실내에서 빈둥대며 먹고 놀 기회는 이때뿐이다.


부풀어 오른 배를 부여잡고 쓰러진 채로 괴랄한 외계인 애니메이션을 보며 몇 시간을 보내다가, 친구가 물었다. '케이크 언제 먹을 거야?' 때마침 친구 애인의 생일이 며칠 지나지 않아 선물로 받은 미니 케이크가 있다고 했다. '케이크 배는 따로 있잖아요?'라고들 하는데 정말 그런 걸까? 그런 듯했다. 우리는 또 거의 신음을 하며 케이크를 먹고, 다른 친구가 자그마치 이탈리아 토스카나에서 가져다준 멜론향의 식전주까지(...) 나눠 마셨기 때문이다. 친구는 크림이 들어가 달큰달큰하고 보드라운 멜론 리큐르가 정말 마음에 든다고 했다. 반면 친구 애인은 고등학교 때 미술실에서 맡던 신나(thinner) 비슷한 냄새가 난다면서 잘 마시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알코올 함량 17%에 불과한 이 리큐르에서는 30-40도의 술을 능가하는 알코올 냄새가 퐁퐁 풍겼다. (코를 휴지로 막거나 집게로 집고 마셔야 하는 것인가?!) 나는 크리미한 주황색의 액체가 든 와인잔을 보며 메로나 한 개를 까서 참방 담그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안타깝게도 친구네 집은 고층 아파트 단지에 있었고, 가장 가까운 편의점까지는 도보로 7-8분가량 가야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너무도 게을렀다. 굿바이, 메로나. You'll be in my heart. 넌 내 마음속에 남으리.



테리야키 소스의 닭고기와 새우, 괴랄한 외계인 애니메이션, 집에서 무려 더치 장비로 직접 내린 진한 콜드브루 커피, 멜론 리큐르와 티라미수 케이크의 나른한 오후는 금세 후다닥 지나갔다. 배가 터질 듯이 부르지만 않았다면 시간이 더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집돌이와 집순이로 구성된 삼인조에게는 만족스러운 일요일 오후의 일정이었다. 더 무엇을 바랄 수 있단 말인가? (메로나...) 느지막한 오후에 그 집을 나오던 순간에도 나의 정신은 여전히 절반쯤 잠든 상태였다. 닭과 새우는 여전히 내 위장 속에서 내게 자장가를 불러 주고 있었다. 자장자장 자장자장, 에헤라디야... 아니면 멜론향의 술 때문이었을까? 그날 점심 이후의 모든 기억에 60% 안개 필터가 씌워진 기분이다. 깊고 어둑어둑한 산속을 헤맬 때의 무시무시하고 기분 나쁜 안개가 아니라 멀리서 바라보는 청산의 풍경에 씌어 마음을 토닥여 주는 그런 안개. 그리고 그 청산은 왠지 모르게 메로나를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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