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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헤라디야 Oct 20. 2023

서울에서 관광객 되기

우리의 관점은 다르기에 더욱 아름답다 - 2

"자리가 없습니다. 뒤차 5분 있으면 와요. 그거 타세요." 남산골 한옥 마을을 본 후 친구 D와 한국을 방문 중인 D의 어머니, 나는 다시 서울 시티 투어 버스를 타고 남산, 정확히는 N서울타워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남산타워' 세대인 내게는 아직도 낯설게 느껴지는 명칭이지만.) 그런데 버스에 자리가 없단다. 2층짜리 버스에 자리가 없어서 사람을 못 태운다고? 주말도 아니고 평일인데 대체 몇 명이 이 버스를 이용 중인 거지? 기사님은 계속해서 뒤차를 타라는 말만 반복하셨다. 고개를 돌려 보니 줄 선 사람 중 한국인은 나 혼자인 듯했다. 버스를 기다리던 외국인 승객들은 기사가 못 타게 하면서 무언가를 말하자 다들 의아한 눈치였다. "자리 없대요. 5분 후에 또 오는데 거기 타래요." 그런데 또 잠시 후에 기사님의 발표가 뒤따랐다. "뒤차도 자리 없답니다. 서서 가실 분들만 타세요." 엉겁결에 통역이 된 내가 전달했다. "뒤차로 자리 없으니까 서서 가도 괜찮은 분들만 타래요." D의 어머니는 서서 가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러시다면야... 우리를 비롯한 일부 승객이 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았고 버스는 출발했다.


한옥 마을 정류장에서 남산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버스는 푸른 나뭇잎이 빽빽하게 드리운 길을 굽이굽이 지나서 남산 꼭대기를 향해 달렸다. 창밖으로 평일인데도 남산에 오르는 시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D는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는 소수의 시민을 보며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버스 지붕의 창으로 보이는 나뭇잎들이 당장이라도 사각거릴 듯했다. 그래, 10월 중순은 서울을 여행하기에 참 좋은 시기구나.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고 여름의 녹음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모습. 그러니까 버스에 이렇게 사람이 많지. 남산까지 선 채로 올라가려니 D의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비록 그녀는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걸어 올라가는 것보다는 훨씬 편하답니다. 제가 계단으로 올라가 봐서 알아요. 진짜로.)


계속해서 달린 버스는 N서울타워 정류장에 도착했다. 정류장은 마침 전망이 좋은 장소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엄마, 어제 우리가 갔던 데가 저기야." D가 잠실 롯데타워를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 저 멀리 한강 저편으로 우뚝 솟은 롯데타워가 보였다. 두 사람은 롯데타워를 방문해 즐거운 시간을 보낸 모양이었다. 고소공포증이 심한 나로서는 그 건물 꼭대기 근처의 어딘가에 있다는 유리 바닥 이야기부터 떠오르면서 아찔해졌지만. (주저앉아 벌벌 떨면서 우는 건 1층에서도 할 수 있지 않나요?) "위에 올라갔다 왔어?" "아니." (왜 괜히 안심이 되는 걸까.) D는 D서울 타워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위엔 올라갔다 왔어." "전망대까지?" "응, 엄청 비싸더라. 거기까지 안 올라가도 충분히 서울 경치가 잘 보이는 것 같아."


우리 세 사람은 N서울타워를 향해 걸어 올라갔다. D의 어머니는 도중에 힘들다며 잠시 쉬어 가기를 원했다. 천식병자이자 무릎이 약한 나였기에 그분의 심정이 이해됐다. "메인주에 '자유의 깃대'라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보다 더 높은 건축물이 세워질 예정인데 건축 기금 기부에 참여할 생각이야." D의 어머니가 말했다. 그 외에는 거대한 성조기가 계양될 예정이란다. 와우! 그 남다른 스케일이라니. 역시 미국다운 발상이었다. 만약 N서울타워 꼭대기에 거대한 태극기가 게양된다면 어떨까? 몹시 뜬금없게 느껴질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의 N서울타워에는 무엇이 있을까? 거대한 태극기는 없지만 수많은 자물쇠가 있다! "저기 자물쇠들 보이세요? 연인들이 영원한 사랑을 기원하면서 채워 놓는 거예요." 그러자 D가 말했다. "내 것도 세 개는 될걸." "세 개 다 와이프랑 한 거야?" "..." "대답하시지요." "...다른 사람들이랑..." D가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까지 함께 걸어 올라와서 자물쇠를 챙길 정도면 진짜 영원히 사귀어야 해." "버스 타고 올라오는 커플들은 뭔데?!" "..."




N서울타워에 들러서 달콤 쌉싸름한 시나몬롤을 위장 속에 갈무리하고 저 멀리 보이는 서울 시내의 풍경을 감상하며 시간을 보낸 후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이번 목적지는 DDP(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순전히 뭔가 이국적인 메뉴로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인도와 네팔식 음식점에, D는 우즈베키스탄 음식점에 가고 싶어 했다. 결국 오래 걷기 힘든 D의 어머니를 생각해서 우리는 정류장에서 더 가까운 우즈베키스탄 음식을 선택했다. 그곳의 양고기 수프는 소위 말하는 노린내를 약간 풍기며 내 취향을 저격했다. (그 냄새는 양고기의 지방에서 나는 것으로 새끼양을 도축해 만든 고기는 지방이 적고 노린내가 거의 나지 않는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한참 전에 사고인가 질병인가로 후각을 잃은 동생의 친구는 노린내가 안 느껴져서 더 이상 양고기 먹을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한탄했단다.) D는 '오늘은 쌀 먹는 날'이라며 볶음밥을 공략했고, D의 어머니는 안타깝게도 주문한 케밥이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레몬차와 가지 샐러드로 배를 채웠다. 참고로 D는 그 케밥을 '무지무지 맛있다'라고 평가했다.


우즈베키스탄 식당에서 먹은 만찬. 먹다가 급하게 찍었지만 양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군침을 흘릴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D의 어머니 손이 미끄러져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이 우렁찬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수면 부족으로 반 좀비 상태였던 D와 나도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큰 소리였다. 흥미롭게도 이곳에는 빗자루를 들고 부리나케 달려오는 종업원은 없었다. 계산할 때 D의 어머니가 사과하자 사람 좋아 보이는 우즈벡 사장님은 방긋 웃으며 계산서에 찻잔값 5천 원을 추가했다. 부디 우리가 나온 후에 바닥에 남아 있던 자잘한 도자기 조각을 깨끗하게 치웠기를...


D는 다음 일정으로 청와대에 가 보고 싶어 했다. 이번에 온 버스는 개방형 2층 버스였고 승객이 많지 않았다. 에헤라디야! 우리는 의기양양하게 2층 오른쪽 좌석에 앉아 평소와는 다른 시각으로 서울의 다양한 풍경을 음미했다. "야, 이거 진짜 끝내준다." D가 감탄했다. D의 어머니도 몹시 즐거운 눈치였다. 애초에 이 코스를 추천하며 내가 의도한 것도 바로 그거였다. 시각의 각도가 달라지면 관점 또한 달라진다. 빽빽한 빌딩숲이 아니라 건물 하나하나가 더욱 가까이 다가오고, 가로수의 줄기는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느껴진다. 마침 그날은 날씨가 무척 화창했다. 눈부시게 밝지만 뜨겁지는 않은 햇볕을 받으며 달리기에는 아주 그만이었다. 산들바람이 불어와 승객들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이대로 서울 끝까지 달려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버스는 대학로를 지나 창경궁, 창덕궁에 멈췄다가 청와대 쪽으로 향했는데... 막 내릴 준비를 하려던 찰나에 청와대에 정차하지 않는다는 기사님의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D는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버스는 경복궁 쪽으로 돌아 다시 코스의 시작점인 광화문으로 향했다. 우리의 서울 시티 투어 버스 승차는 그렇게 마무리됐다. 개인적으로는 2층에 앉아 한 바퀴 더 돌고 싶었지만 D 모자는 이미 충분히 즐긴 눈치고 D는 아무려면 현대인 아니랄까 봐 커피 타령을 해댔다. "혜화에서 묵는다며? 그곳에 아주 오래된 카페가 있는데 거기로 가 볼래?" 두 사람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래서 우리는 버스, 이번에는 시내버스에 올라 다시 대학로로 향했다. 서울 시티 투어 버스야, 다음에 탈 때까지 안녕! 잘 있어! (개방형 2층 버스 운행 좀 늘려 주세요... ㅠㅠ)


대학로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혜화의 오래된 카페'라는 말만 읽고도 장소를 예측했는지 모른다. 내가 두 사람을 이끈 곳은 학림다방이었다. 1956년부터 운영된 이 다방은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으로서 오늘날까지 이른바 '핫플'로 통한다. 아버지와 학림다방과의 인연 때문에 나는 어릴 때 이곳에 자주 드나들었지만 비교적 최근에야 다시 이 추억의 장소를 찾게 되었다. 예스럽지만 촌스럽지 않은 분위기에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 내가 이곳에 데려온 외국인 친구들은 다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느냐며 놀라고 감탄했다. 달콤하고 짙은 풍미가 담긴 크림이 듬뿍 올라간 비엔나커피는 학림다방에서 맛볼 수 있는 특별한 메뉴이다. 잔받침에 얹혀 나오는 작은 스푼으로 크림을 떠먹어도 맛있지만, 크림과 그 밑의 커피를 함께 흡입하면 더 풍부한 맛을 즐길 수 있다. 평소 아메리카노만 마시는 D도, 달콤한 걸 즐기는 D의 어머니도 이 커피만은 이구동성으로 맛있다는 반응이었다.


학림다방의 명물, 비엔나커피. 왼쪽으로는 업무와 관련된 문자가 와서 장문의 답신을 보내느라 잠시 꺼낸 휴대용 블루투스 키보드가 보인다.


우리는 유자차를 접한 적이 없다는 D의 어머니를 위해 보기만 해도 새콤달콤한 유자차도 한 컵 시켰다. 역시나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역시 당충전은 중요한 거구나. 다른 대륙에서 온 사람이라고 크게 다르지도 않네. 하긴 그곳은 달달하다 못해 혀가 아릴 정도로 달콤한 음식이 널리디 널린 곳이니까. 좋은 걸 보고 맛있는 걸 먹어서일까, D 모자의 분위기는 지극히 좋았다. D가 어머니의 방문을 앞두고 불안해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된 건 저녁식사 자리에서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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