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 때 이사 날짜가 맞지 않아 며칠간 외갓집에서 지낸 적이 있다. 외갓집은 다니던 학교와 거리가 꽤 있었는데, 일이 바빠 직접 데려다줄 수 없었던 엄마는 나를 혼자 택시에 태워 보냈다. 부모님의 어쩔 수 없었던 상황과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을 지금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여덟 살 어린이에게는 아무래도 많이 불안하고 무서웠던 것 같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출발하는 택시 안에서 조마조마했던 그 순간의 기억이 어렴풋이나마 여전히 남아있는 걸 보면. 혼자 택시를 탔던 그날은 내가 부모와 낯선 공간에서 혼자 떨어져 본 꽤나 강렬한 첫 기억이다.
일곱 살 치고도 겁이 많은 편인 현진이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혼자서 현관 밖을 나가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며칠 전 (적어도 나에게는) 아주 드라마틱한 사건이 있었다. 하원 후 아이들과 집 바로 앞에 있는 놀이터에서 놀다가 집에 돌아오고서야 벤치에 책을 두고 온 게 생각이 났다. 슬쩍 현진이에게 혼자 나가서 가져와볼 수 있겠느냐 물었는데 현진이가 덥석 해볼 수 있겠다며 문을 나섰다. 물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현관을 나가 달리면 1분도 안 걸리는 코 앞의 놀이터였지만, 현진이는 난생처음으로 부모 없이 집 밖을 나갔다 왔다. 겨우 1분 거리를 혼자 다녀온 게 어찌나 대견하던지. 처음으로 혼자 부모의 울타리를 벗어나 밖을 나갔던 그 순간을 나는 창문에 서서 동영상에 남겨 두었는데, 남편은 그 동영상을 보며 심지어 눈물이 날 것 같았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은 며칠 전처럼 '드라마틱'이라는 말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날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무지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오만 감정을 다 느낀 날이다. 그중에 가장 크게 느꼈던 마음을 굳이 골라야 한다면, 아마도 '대견함'일 것이다. 대단하고 대견한 나의 아들. 오늘 현진이는 아주아주 멋진 일을 해냈다.
오늘은 현진이가 한자 7급 시험을 보는 날이었다. 낯선 곳에 혼자 있어본 적 없는 현진이를 위해 아빠도 바로 뒷 번호로 시험 접수를 해두었었다. 그런데 웬걸. 아빠가 현진이 뒤에서 시험을 보고 둘이 함께 손잡고 나올 거란 나의 예상과는 달리, 현진이는 1학년 맨 끝 반의 맨 끝자리로, 아빠는 2학년 맨 앞 반의 맨 앞자리로 배정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빠와 반도 다르고 심지어 층도 다르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현진이는 울기 시작했다.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아 시험을 못 볼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였다. 괜찮을까 싶었지만 훌쩍거리면서도 현진이는 혼자 교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고, 그렇게 시험은 시작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30분 정도가 지나고 낯선 선생님의 손을 꼭 잡은 채 울면서 나오는 현진이의 얼굴이 보였다. 아이고, 망했구나. 시험은 시험대로 못 보고, 아이에게는 트라우마만 만들어줬겠구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런데 현진이는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그치고는 '그런데 나 시험 잘 본 것 같아'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고 당황스럽고 두려운 상황에서 끝까지 해내고 나왔다니. 눈물을 아주 그치지는 못해서 조금씩 울면서 시험을 봤는데 잘 본 것 같고, 나와서는 출구를 못 찾아서 눈물이 났지만 어떤 선생님이 바로 도와줘서 괜찮았고, 사실은 울면서도 혼자 나오는 길을 찾아보고 싶었다는 용감한 말까지. 어느새 눈물은 쏙 들어간 신난 얼굴로 영웅담처럼 이야기를 펼쳐대는 아들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이 어찌나 두근두근 주체가 안 되던지. 현진아, 너 지금 정말 슈퍼영웅 같아!
현진이가 태어나 처음 얼굴을 마주한 날, 처음 옹알이를 하던 날, 처음 일어서고 처음 걷던 날, 처음 유치원에 가던 날. 현진이의 처음을 마주하는 모든 순간 나는 매번 벅차고 또 벅찼다. 나도 겪었고 모두가 자라면서 겪었을 그 순간들이 내 아이에게 와서는 소중한 선물이 되어 나를 기쁘게 만들어줬다. 그 시기엔 누구나 당연히 해내는 일들을 내 아이가 해내고 나면 그날은 유난히 반짝이는 특별한 하루가 되었다. 아이가 성공해내는 무수한 처음은 엄마로서의 힘듦을 놀랍도록 싹 씻겨 내려가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그날마다 나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행복했다.
시험은 오전 11시였고 시험이 끝난 지도 한 나절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나를 보고 눈물을 뚝 그치며 시험 잘 본 것 같다 외치던 현진이의 얼굴만 떠올리면 울컥하게 된다. 처음 엄마와 떨어져 낯선 곳에서 끝까지 시험을 보고 나온 아들이 대단하다. 수험번호와 이름을 잊지 않고 쓰고, 시험을 다 보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시험지를 제출하고, 책상 위에 있던 본인의 물건을 잘 챙겨서 나온 모든 과정이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다. 그 모든 것을 혼자서 해낸 현진이 인생의 첫날. 현진이의 씩씩한 처음을 지켜보며 온전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행복이 넘치고 넘쳐 눈물처럼 흘렀다. 사랑한다며 수백 번을 안아줘도 부족하고, 엄지 손가락에 쥐가 날만큼 수없이 대단하다고 손가락을 치켜들어줘도 아쉬운, 오늘은 그런 날이다.
앞으로도 현진이는 많은 처음을 경험할 테고, 그런 처음을 함께 하는 모든 순간 나는 오늘 그랬던 것처럼 안쓰럽고 대견하고 감사하고 기뻐할 것이다. 내 표현이 어떻든, 아마도 현진이는 내 마음이 어떤지 반의 반도 모르겠지. 아무리 말해주고 안아주고 뽀뽀해줘도 다 꺼낼 수 없는 엄마의 마음을, 그 크기를 현진이는 모르겠지.
돌이켜보면, 나의 엄마도 그러지 않았을까. 유난히 작았던 8살 딸을 처음으로 혼자 택시에 태워 보내던 그날 엄마도 걱정에 파묻혀 하루를 보내고는, 잘 다녀온 나를 보고 내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안도하고 기뻐하지 않았을까. 무서웠지만 그날의 나 역시 결국은 잘 해냈고, 그런 처음들을 무수히 겪으며 잘 자라왔다. 엄마는 이제 나를 어떻게 키웠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며 아쉬워하지만, 엄마 곁에서 함께 해온 나의 처음들이 미안함과 대견함과 감사로 엄마의 마음에 차곡차곡 예쁘게 쌓여있을지 모른다.
엄마는 여전히 종종 내가 무언가를 할 때마다 '넌 정말 대단하다'는 말을 진심으로 건네곤 한다. 그리고 오늘 나는 현진이가 진심으로 슈퍼영웅 같았다. 엄마가 나를 바라보는 마음과 내가 현진이를 바라보는 마음이, 사랑이, 똑같아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