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공항. 오후 9시, 출국 수속을 마치고 나서야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탑승 시간까지는 3시간 이상이 남아있었다. 어디로 출 도착하기엔 다소 늦은 시각, 대부분의 면세점과 음식점은 문을 닫았고 드문드문 앉아 있는 생기 잃은 여행자들과 주인을 충성스럽게 지키는 짐가방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산하다 못해 한기가 도는 차가운 철제 공항은 의자까지 여행자에게 불친절했다. 딱딱한 등받이와 꿈쩍도 하지 않는 양쪽 팔걸이 사이로 몸을 구겨 넣고 무거운 눈꺼풀을 닫았다. 꽤나 길었던 2주간의 크로아티아 여행을 회상했다. 여행자의 초심을 찾기 위해 시작한 이번 여행은 초심은 커녕 아쉬움도 만족도 없었다. 낯선 도시들을 이동하며 적응해야 했던 몸은 자주 퉁명스러워졌다. 특별하게 다가오지 못한 도시의 풍경들은 작은 구멍 하나 채우지 못할 정도로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당분간 여행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크로아티아 남부 항구도시 두브로브닉 올드타운에 도착했을 때, 성안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하고 이상적으로 바라보던 그대로였다. 아드리안해의 차가운 해풍과 뜨거운 햇볕이 섞여 적당한 온도를 내뿜는 바람은 골목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이곳에 사는 바람들은 매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조금씩 성벽과 건물의 외관을 갉아먹었다. 관광객을 상대로 기념품과 특산품을 팔고, 음식 장사를 하는 현지인들은 아침 10시쯔음 느지막하게 문을 열고 오후 5시~6시가 되면 칼같이 셔터를 내리고 자취를 감췄다. 그들은 그렇게 친절하지도 유난히 냉대하지도 않은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겨울 바람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한 3월 중순의 두브로브닉은 차분하고 조용했다. 적은 수의 관광객들이 성벽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 성벽을 오르고 성곽을 따라 한바퀴 돌던 그날도 날씨는 구름한점 없이 맑고 투명했다. 앞서 거쳐온 도시들에게 많은 기력을 빼앗긴 탓에 나에게 성벽투어는 이곳에 온 이상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코스 중 하나였다. 가파른 돌계단과 뜨겁게 내리쬐는 오전의 땡볕은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언제 다시 오겠어, 좀더 둘러보고 내려가자” K의 다독임이 없었다면 올라온 지 5분도 되지 않아 다시 내려갔을지도 몰랐다. 듬성듬성하게 쌓아 올린 성벽의 틈 사이로 푸르다 못해 시퍼런 바다가 출렁거렸다. ‘눈부시게 아름답다’ 라는 말은 이곳에서는 굳이 말할 필요 없는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당연한 것을 특별하게 느끼고 감탄하는 것은 오래전 지어 놓은 낡은 성곽을 거니는 관광객 뿐이었다.
따사롭다 못해 따가운 지중해 볕은 위에서 거쳐온 자다르와 잠깐 다녀온 차브타드에서도 충분히 만끽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날씨가 매일 환하지는 않았다. 불과 며칠 전 이틀간 머물렀던 플리트비체에서는 머무는 내내 비가 내렸다. 비는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플리트비체는 축축했다. 국립공원 매표소까지 걸어가는 길목은 ‘오늘 트레킹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적막했다. 빗줄기가 강해졌다 약해졌다 반복하는 날씨 덕분에 오들오들 떨며 돌아다녀야 했다. 흙투성이가 된 신발 바닥을 대충 털고 매표소로 들어가니 강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직원이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이런 날 여기에 와 왔냐’는 듯 크게 치켜 뜬 눈으로 쳐다보는 노랑머리의 여직원을 상대하고 나니 더욱 한기가 돌았다. 티켓을 건네는 울퉁불퉁한 손가락 관절이 내 손등에 부딪혔을 때는 온몸에 털이 삐쭉 서는 것 같았다. “저 사람도 피곤하겠지, 매일 이렇게 지루한 일을 한다고 생각해봐, 어느 누구에게 친절하겠어?” K는 축 처진 나를 달래느라 여념이 없었다. “K, 그만 조용히 좀 해줘” 나는 눈치없는 K를 조용히 시켰다. 빗물에 젖은 무거운 발소리만 ‘타박타박’ 이어졌다.
비수기 시즌에 출입 제한 구역이 많아 국립공원 트레킹 코스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갈림길이 나오면 K가 선택한 방향으로 들어섰고 그럴 때 마다 항상 출입 제한 구역이 있거나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었다. 산 짐승한테 해를 당하거나,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호수에 빠져서 꼬르륵거리며 살려 달라고 외쳐도 듣는 사람 하나 없어 죽기 딱 좋은 곳이었다. “여기 원래 이런 곳이야?” 짜증이나러 K에게 물으면 시도때도 없이 조잘거리던 K는 곤란할 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트레킹은 오전 10시에 시작해서 오후 4시쯤에 끝났다. 비를 쫄딱 맞으며 축축한 플리트비체에 감염되어 몸과 마음은 습해졌고 몸살 걸리기 딱 좋은 상태가 되어있었다.
“너 비 맞는거 좋아하잖아?” 5년전 프로방에서 비 맞고 돌아다닌 거 기억 안나?“ K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케케묵은 추억을 꺼내 왔다. 여행이라는 취미를 막 시작했을 때는 어디서 자든, 무엇을 먹든, 날씨가 좋든 나쁘든 전부 좋았다. 하지만 경험이 쌓일수록 익숙해지는 것들이 많아졌고 어느 순간 여행이 지겹고 따분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겁은 늘어 무모함은 사라지고 몸을 사렸다. 여행에 권태를 극복해보려는 시도가 이번 크로아티아 여행이었다. 처음부터 억지로 끌려 온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은 아니었다. 긴 시간을 날아 도착한 첫 도시 자그레브의 몇시간은 꽤 의욕적이었다. 초심자의 마음으로 예약한 호스텔에 짐을 풀고 북적이는 자그레브 일리차 거리로 나갔다. 한시간도 되지 않아 급속도록 몸은 무거워졌고 속은 불편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쇼핑을 해도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오랜 비행시간 때문에 피로가 풀리지 않아서 라는 결론을 내리고 숙소로 다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아 깊이 잠들 수 없었다. 옆방에는 한국인이 있는 것 같았다. 물을 마시러 공동 거실로 나왔을 때 장기여행 중으로 보이는 한국인 두 명을 만났다. 그들은 오랜만에 낯선 한국인을 만나듯 환하게 웃으며 먼저 다가왔다. 전형적인 여행 히스토리를 들으며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심지어 광장 쪽에 있는 한식당에 같이 가자고 제안을 했다. 저녁을 먹긴 해야 했고 즐거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서, 한편으로는 여행에 푹 빠져 들떠 있는 그들에게 에너지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에 동행하기로 했다. 내일의 일정은 무엇인지,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 지금까지 어떤 나라를 다녀봤는지 등등 이미 맞춰진 퍼즐 같은 질문들이 쉴 틈없이 날아왔다. 교과서에 답하듯 대답했고 예의상 되물어 주기도 해야 했다. 그들은 한식당을 나와 아쉽다며 호프집에 가자고 부추겼다. 나는 이들에게 에너지를 얻기는커녕 흔해 빠진 여행자 레퍼토리를 들어주느라 진이 빠져 있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핑계 같은 변명을 하고 서둘러 숙소로 돌아와버렸다.
크로아티아에 생애 첫 발을 내딛었던 자그레브로 다시 돌아왔다. 탑승을 시작한다는 항공사 직원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구겨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직원에게 탑승권을 내밀자 다른 좌석 번호가 찍힌 탑승권을 건내 받았다. 비즈니스 좌석이었다. 이코노미 좌석이 오버부킹되어 비즈니스로 운 좋게 변경 된 것 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여행 중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자신을 찾아온 손님에게 실망만 줘서 미안한 크로아티아의 작별 선물이었다. “여행은 무조건 많이 한다고 좋은게 아냐” K는 나를 훈계했다. 여행을 좋아한다면 좋아하는 크기만큼 반드시 권태기도 온다. 크로아티아 여행으로 경험했듯, 권태기를 무시하고 억지로 여행을 시도하는 것은 오히려 더 큰 역효과를 일으킨다. 여행 권태를 극복하는 방법은 다시 떠나고 싶어 질 때가지 아무 여행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기다리면 괜찮아 진다. “네가 또 억지로 떠난다고 하면 난 그냥 집에 있을래” 불 꺼진 고요한 비행기 안, 잠들기 직전 달래다 지친 K의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