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운전자와 조수석 동행자의 춘천여행

2022년 4월 강원도 춘천

by 루시

조직개편이 있으니 되도록 길게 자리는 비우지 말라는 팀장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머리말까지 펼쳤던 괌 여행 계획은 씁쓸하게 다시 덮어야 했다. 국내 여행은 생각 없다던 J도 어디든 떠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는지 “춘천이 어떨까”하며 슬며시 의견을 내보였다. 그렇게 시작된 춘천 여행은 준비의 수고로움도 여행지의 기대도 크지 않았다. 다만, 한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운전이었다. 나는 운전을 전혀 할 줄 몰랐고 J는 운전면허가 있었지만 최근에서야 조금씩 실전 운전을 시작한 초보였다. “운전 내가 하면 되지” 제주도에서 여러 번 렌터카 운전을 해본 경험을 말하며 자신 있어하는 J를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한적한 도시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춘천역을 빠져나와 주차장까지, 10분도 채 안되는 거리를 걸으며 눈에 들어온 춘천의 첫인상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시골을 도시로 탈바꿈하려다 멈춰버린 어설픈 도시의 풍경이었다. 타지에서 온 약간의 관광객과 그들 사이에 곁곁이 섞여있는 지역 사람들의 분주한 모습은 소란스럽지만 묘하게 적막한 분위기 풍겼다. 주차장에 도착해 미리 예약해둔 렌터카를 찾았다. 왠지 본연의 색을 잃고 하얗게 세어버린 듯한 늙은 레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거친 손길과 발길질에 영혼은 이미 오래전에 휘발되어 버린 것 같았다. 차 외관에 군데군데 보이는 쓰라린 상처들은 쉴 틈없이 달려야 했던 레이의 고충이 느껴졌다.


춘천의 도로는 목요일 낮도, 금요일 밤도 한산했다. 서울의 빽빽한 도로와 인산인해에 익숙해서 인지 이곳의 교통 체증은 정체도 아니었다. 어딜가나 “왜 이렇게 차가 없지”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덕분에 J는 큰 어려움 없이 운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큰길을 벗어나면 인적 없는 밭두렁과 산길이 튀어나왔다. 도시와 시골의 경계가 모호한 이곳은 음식 맛 마저도 우리에게는 흐리터분했다. 춘천에서 가장 유명한 막국수 맛집이라고 해서 찾아간 첫 식당도 사람이 많지 않았다. 국수를 한 젓가락 입에 넣고 나서 “괜찮네”라고 말하던 J는 그릇을 반쯤 비우고 나서는 말을 바꿨다. “춘천 막국수가 다 이런 식이라면 다시는 안 먹어도 될 것 같아” 거친 메밀면과 간이 쌔지 않아 밍밍한 강원도 음식 맛에 실망이 큰 것 같았다. 나는 다음날도 막국수 맛집 가야하는데 어떻게 할거냐며 웃어댔다.


절대 잠들 수 없는 조수석 동행자 사정

식당에서 나와 레이는 다음 행선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추천의 나른한 풍경, 나른한 날씨, 나른한 도로는 졸음을 몰고 왔지만 차마 잠들 수 없었다. 초보운전자 옆 조수석 동행자의 졸음은 최악의 경우 생사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직선 도로를 지나 교차로에 들어서거나 조금만 복잡한 길목이 나오면 “여기로 들어가는 거 맞아?”하고 묻는 J의 불안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했다. 운전 고수들만 다니는 것 같은 고속도로에서는 사납게 추월해 가는 비매너 차들의 뒷모습을 보며 욕도 해줘야 했다. 좀처럼 힘을 내지 못하는 늙은 레이가 답답하기도 했지만 차라리 우리에게는 다행스러운 파트너였다. 제한속도를 넘어 달리다 단속카메라 표시 지점이 나오면 “줄여, 지금부터 줄여야 해”라고 알려주는 것도 조수석 동행자가 해야 할 일이었다.


불완전이 주는 즐거움

첫날에 묵을 숙소는 낮은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다. 좁다란 산길을 한참이나 올라가야 했다. 우리는 초보운전자의 실력을 망각한 나머지 해가 떨어지고 나서야 산길 어귀로 들어서고 있었다. 전조등을 켰지만 흔한 가로등 불빛 하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J는 무섭다며 끙끙거렸고 레이는 엉금엉금 기었다. “위에서 차가 내려오면 어떡하지?” J의 안절부절은 괜한 걱정이 아니었다. 한참을 올라온 외길을 유턴할 수도 없었고, 옆으로 비켜날 공간조차 없었다. “당연히 앞차가 알아서 후진 해야지, 올라가는 차가 먼저야” 나는 잔뜩 겁에 질린 J와 레이를 조금이나마 안심시키기 위해 되지도 않는 소리를 당연한 듯 말했다. 운 좋게도 난감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J에게 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스릴러를 좋아하는 나에게 야행 산길 주행은 춘천 여행에서 가장 즐거웠던 기억 중 하나였다.


나머지 하나는 건봉령승호대의 기억이다. 은하수 성지로 유명한 전망대인데 가는 길은 초보운전자에게 상당히 고난도다. 산고개를 여러 번 넘어가듯 구불구불한 도로를 한참이나 오르락 내리락 해야한다. 전날 야간 주행 경험 덕분인지 J는 나름 안정적인 운전실력을 보여줬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의심했을 정도로 건봉령승호대는 흔히 떠올리는 전망대의 모습이 아니었다. 고갯길의 꼭대기에 위치한 그곳은 도로 옆 절벽을 막은 가드레인 너머로 덩그러니 꽂혀 있는 푯말과 함께 소양강 전망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땅히 차를 세울 곳도, 여럿이 서있을 만한 공간도 없었다. 허무함에 헛웃음이 났지만 더 웃긴 건 그곳에서 한시간을 있어도 아무도 전망대를 보러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끔 한대 씩 지나가는 트럭이 창문을 내리고 다른 종족을 보듯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시계 토끼를 쫓아 땅굴 속 이상한 나라로 빠져버린 앨리스가 된 것 같았다. 소양강만이 몰래 알고 있었던 낯선 세계에 발을 디딘 것 같은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이틀동안 함께한 레이는 새로운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해 주차장으로 다시 돌아갔다. 별탈 없이 나름 완벽하게 초행길 주행을 마친 J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종종 방지턱을 무시하거나 급정차를 해서 가슴을 쓸어 내리게 했지만 우리 사이의 애정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춘천은 이틀이나 여행할 만큼 볼거리나 먹거리가 많은 여행지는 아니다. 버스가 다니지 않고 택시기사들이 꺼려할 만한 위치에 가볼 만한 곳들이 숨어 있어서 여행이 목적이라면 렌터카는 필수다. 초보운전자와 조수석 감시자의 렌터카 여행은 서툴렀지만 서툴러서 더 즐거웠던 순간이 있었다. 당연히 능숙한 운전자라면 여행의 범위는 더 커진다. 다음번에는 둘 다 능숙한 운전자가 되어 밤하늘의 은하수 보러 건봉령승호대에 오르자고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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