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의 또 다른 말, 새로운 시작

by 루시


“잊지 마. 끝이 아니라 시작이야, 끝인 것처럼 보여도 끝이 아니야, 항상 그다음이 있어.”


최근에 종영한 JTBC 드라마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에 나오는 대사다. 극 중 남자 주인공이 끝을 앞두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당부의 말이지만, 결국 드라마가 시청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주제 의식이기도 하다. 드라마 마지막 회를 보며 지금까지 겪어 왔던 ‘끝’을 돌이켜보고 싶었다. ‘정말 그건 끝이 아니었을까’ 궁금했다. 삶에서 끝을 경험하는 순간은 수없이 많다. 반복되는 하루에도 끝이 있다. 오늘도 내일이 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날이 된다. 매일 비슷한 패턴으로 되풀이하는 날들이지만, 사실 하루하루가 다른 날이기에 매 순간 시간의 끝을 흘려보낸다. 지금도 눈 한번 깜빡이면 지나가는 찰나의 끝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기억 속에 끝은 이런 것들이 아니다. 이별, 졸업, 퇴사 등 “끝이구나” 하며 입 밖으로, 속으로 말했던 시간이었다. 좋은 감정보다는 아쉬움, 슬픔, 불안이 압도적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아프다는 이유로 학교에 가지 못했다. 누워있던 내 옆에서 담임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 졸업식에 가지 못할 것 같다는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병원에 들렀다, 잠깐이라도 학교에 가자고 엄마는 설득했지만 나는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3년의 시간을 제대로 매듭짓지 않는 것 같아 찝찝했다. 돌이켜보면 아쉬움은 남지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이었다. 그날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학교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몇 달을 돌보던 길고양이가 죽고, 몇 년을 키우던 개를 다른 집으로 보냈으며, 꽤 오래 같이 살던 친척 동생도 자기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러니깐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작스레 끝을 맞닥뜨려야 했던 시간이 힘들었다. 슬프다는 감정은 너무 거대해서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 나를 삼키려고 했다. 슬픔을 동반하는 끝을 여러 차례 겪고 나니 끝이 두려워 시작도 주저하고 있었다.


두려움 속에서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인 것처럼 시작하는 일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글쓰기다. 몇 년 전 글쓰기 수업을 들으면서 일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일주일에 초고 한 편, 퇴고 한 편을 썼다. 매일 글쓰기 과제라는 무거운 중압감을 짊어지고 다녀야 했다. 마지막 글쓰기 수업을 하던 날, 참 많이 슬퍼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어떤 일에도 슬픔을 만들어 내는 탁월한 재주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 글쓰기 수업이 후련하기도 했지만, 상실감이 컸다. 내가 다시 글을 쓸 수 있을까, 책을 내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런 날이 과연 올까, 라는 의심이 짙었다. 억지로 붙잡아 둔 탓에 나를 괴롭히던 글을 놓아주고 나니 상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내가 쓴 글들이 마치 사람인 것처럼, 이별을 겪은 것처럼 말이다.


진하고 흐릿하게 인생에 한 줄씩 문장의 끝을 짓고 나니, 그 끝에 마침표가 찍혀 있는지 아니면 이어진 새로운 글을 쓰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사실 졸업식에 가지 않았던 이유는 몸 상태가 좋지 못한 이유도 있었지만, 3년 내내 단짝이었던 친구와 사이가 틀어져 얼굴조차 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누구에게도 학교에 왜 오지 않냐는 문자 한 통 받지 못했다. 3년 내내 마음을 숨기기에 바빴고,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선을 그었던 내 행동의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얼굴도 보기 싫었던 친구에게 연락을 다시 했고, 진심으로 모든 것을 털어놓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추측이지만 졸업식 날 그 아이와 마음에 없는 어색한 웃음을 비추고 어영부영 끝인사를 나눴다면 먼저 연락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졸업이라는 것을 하고 말끔하게 끝맺지 않아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고등학교 3년 끝에 가장 친한 친구 한 명을 얻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존재가 내 곁에서 떠나는 경험을 어렸을 때부터 겪어서, 누구에게도 쉽게 정을 주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길고양이가 죽고, 반려견을 보내고, 친척 동생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울고, 마음이 괜찮아질 때까지 혼자서 감내하는 일은 매우 벅찼다. ‘끝은 좋은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이별 후 단정 짓고 있었다. 생명 그리고 관계에 영원은 없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난 제자리에 항상 그대로 있는데, 왜 다들 떠나는지, 그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생채기를 남기고 사라지는 존재가 원망스러웠다. 관계는 완전한 끝도 있었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시작하기도 했다. 동물을 좋아하는 방식에 확고한 가치관이 생겼고 친척 동생과의 관계는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성인이 되어도 어리고 나약한 나를 성장시켜 준 것은 다름 아닌 글쓰기다. 글쓰기 수업을 들었던 기간은 힘들었지만 행복했다. 새벽에 쓰는 글, 적막 속에서 쓰는 글은 나를 위로했다. 억지로 밝히지 않으면 어둡고 슬픈 글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나쁘지 않았다. 글쓰기 선생님에게 글쓰기 스킬만 배운 것이 아니었다.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를 배웠다. 예민하고 날카롭던 마음에 여유가 생겼고 이전보다 삶을 가볍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글쓰기 수업의 끝에 상실감이 컸다. 하지만 끝내야 했다. 혼자서 해야 할 시간이었다. 글쓰기 수업을 끝으로 새로운 시작은 많았다. 글은 나에게 조금 멀어지긴 했지만 떠나지 않았고, 곁에 머물러 있다. 내 속도는 아주 느리지만 새로운 길을 향해 조금씩 걸어가고 있다.


앞으로도 수많은 끝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Pt 도 끝을 내야하고, 회사에서 가장 친한 동료도 곧 퇴사를 앞두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이별도 겪어야 한다. 시간은 끝이 두려운 나를 위해 잠시 멈춰주는 자비는 없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휘청거리지 않으려면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희망이 필요하다.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은 이미 알고 있는 그 사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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