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산골짜기 둥지의 가을은 보라색이다.
봄에는 민들레가 이 언덕을 노란 빛깔로 채운다면 가을에는 보라색 꽃향유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곳, 맨 처음 발을 들였을 때 우리를 반겨준 꽃은 꽃향유였다. 억새와 함께 보라 꽃들이 언덕을 메우고 있었다. 아직 개간되지 않은 황폐한 언덕에 보라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향을 내뿜고 있었다. 향이 강한 허브 종류의 꽃. 꽃향유는 9~10월에 산자락에 주로 핀다. 꽃향유는 여름 감기, 부종, 구토, 설사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 꽃 때문에 이곳을 개간하여 허브를 키울까 생각도 해봤다.
향이 강해서인지 꽃향유가 필 때면 꿀벌들이 꽃 주위로 날아와 꿀을 먹느라고 정신이 없다. 꿀벌들의 날갯짓 윙윙 소리가 요란하다. 나도 하루는 꿀벌이 되어 꽃향유를 채집했다. 꿀벌들을 무서워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꿀벌들은 자신을 괴롭히지 않으면 쏘지 않는다. 그것을 알기에 안심하고 여기저기 허리를 숙여가며 꽃향유 대공을 땄다. 여기 와서 청 담는 일이 나의 일 하나가 되었다. 차츰 나도 여기 생활에 익숙해져 갔고 하나 둘 채집하기 시작했다. 이웃 주민들 중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를 따 꽃차를 만드는 분도 있다. 그런데 나는 그 과정이 번거롭게 느껴졌고 무엇보다 아직 피지도 않은 꽃을 꺾고 싶지 않았다. 꽃이기에 한 번이라도 아름답게 펴보고 사라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적당한 양을 채집하여 씻고 담고 설탕을 부었다. 그리고 5,6개월 지나 숙성된 효소를 따뜻한 물에 타 먹었다. 향이 강해서인지 꼭 쌍화탕을 먹는 느낌이었다. 처음엔 거북했지만 먹고 난 다음날에는 이상하게 몸이 좋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침에 간간이 마시는 꽃향유 차는 또 하나의 행복이 되었다.
이곳에 많이 나오는 식물, 열매 등은 그때그때 담아놓거나 말려놔야 한다. 다음에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지나다 보면 채집하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나의 짝꿍이 너무 부지런해서이다. 언덕에 난 풀들을 이발하듯 깔끔하게 베어버린다. 그래서 그런가 해마다 자라는 꽃과 풀들이 조금씩 다르게 자란다. 어떻게 보면 꽃과 풀들에게 서로 싸우지 않고 양보하며 자리를 내어주는 샘이라 할까.
몇 년째 꽃향유를 볼 수가 없다. 조금은 있지만 전처럼 군락지는 볼 수 없다. 꽃향유가 그리워진다. 이제 짝꿍에게 들꽃이 있는 곳은 베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그 사이 여귀 풀이 여기저기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농막 뒤쪽에서 윙윙 소리가 군집을 이루듯 요란하게 들려온다. 집 뒤로 가보니 여귀 꽃이 만발하게 피어 있다. 조밥처럼 다닥하게 붙어 있는 꽃봉오리 사이에서 꿀벌들은 부지런히 꿀을 딴다. 꽃 색깔이 화려하다. 하나의 붉은색이 아닌 분홍, 하얀, 보라색이 어우러져 있는 여귀 꽃의 아름다움과 여러 마리의 날갯짓 소리가 새삼 음악처럼 잘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