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가져다주는 큰아들’
“크흐흑”
재이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아이를 재운 뒤 잠이 안 와 휴대전화로 맘카페 글을 읽던 중이었다. 한 엄마가 남편과 소통이 어렵다는 하소연을 올렸다. 얼마 안 돼 공감하는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중 한 엄마가 자신은 배우자와의 소통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월급 가져다주는 큰아들로 생각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는 것이다. 재이는 교복을 입고 월급봉투를 가져다주는 남편을 떠올려 보았다.
임신과 육아라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을 때, 자신을 닮은 작은 생명을 돌보는 일은 기쁨이 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밤낮없는 돌봄은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다. 공감을 바랐던 남편은 일이 바빠 얼굴조차 보기 힘들어졌다. 서로가 이해받지 못하며 싸우게 되는 일도 잦아졌다.
아무래도 음주와 야근으로 배가 나온 중년의 남편을 큰아들로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차라리 옆집 남자로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과 아이만 있다고 상상하니 육아와 집안일이 오롯이 자신만의 일로 여겨졌다. 몸은 더 힘들었지만 기대하는 대상이 없다 보니 왠지 마음은 편했다.
Day 1.
옆집 남자가 일이 많았는지 오늘은 밤늦게 들어왔다.
Day 2.
옆집 남자가 자신의 용돈을 제한 월급을 통째로 주었다.
Day 3.
옆집 남자가 주말에 아이와 30분 놀아주었다.
Day 4.
저녁에 아이를 재우고 나오니 옆집 남자가 맥주와 포테이토 칩을 사서 들어왔다.
검정 봉지를 뒤적이더니 초콜릿 바를 하나 건네주었다.
장난에 가깝게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남자의 작은 배려와 친절이 전보다 크게 느껴졌다. 그 무렵 재이는 시간제 일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미 많은 집안일을 하고 있었지만, 사회활동에 대한 욕심도 조금은 채우고 싶어졌다. 이력서를 넣은 지 며칠 되지 않아 한 학원에서 연락이 왔다. 주말에만 5시간 근무하는 일이었다. 시급이 크진 않았지만, 기회를 잡기로 했다. 조심스럽게 옆집 남자에게 말을 꺼냈다. 남자는 그 정도 시간이면 아이를 봐줄 수 있다고 했다. 설렘과 긴장감을 가지고 근무를 시작했다. 이전에 경험도 있던 터라 며칠 일하다 보니 업무에 금세 익숙해졌다. 어찌 보면 내 아이를 떠나 남의 집 아이를 봐주는 일이었다. 그래도 공부라는 목적이 있고 그 순간만 최선을 다하면 퇴근 후에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어른 대화도 그녀의 숨통을 트이게 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남자가 아이와 텔레비전을 보거나 놀고 있었다.
“밥은?”
“응, 아까 차려 먹었지. 나 이제 좀 들어가 쉴게.”
피곤한 표정의 남자는 재이가 돌아오면 안방으로 들어가 낮잠을 잤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오랜 시간 아이를 봐준 것은 처음이었다. 아이도 적응이 되었는지 잘 놀다가 엄마가 돌아오면 활짝 웃으며 달려와 안겼다. 그녀는 반기는 아이를 데리고 다시 놀이터로 나가곤 했다. 일하고 들어오자마자 다시 일하러 나가는 모양새지만 왠지 모르게 다시 힘이 생겼다. 한 달여가 지나 그런 일상은 자리를 잡았다. 어느 날에는 남자가 아이와 드라이브하겠다며 먼저 나섰다. 수업이 끝날 무렵에는 학원까지 차로 데리러 왔다. 아이는 차에서 이미 잠들어 있었다. 남자가 인천 바닷가에서 아이와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았다. 여자가 없는 남자와 아이의 일상은 공감이 가면서도 흥미진진했다. 열심히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다 보니 데이트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날 저녁 아이를 재우고 둘은 거실에서 치킨을 시켜 맥주를 마셨다. 재이가 한 달 월급을 받은 참이니 한턱내겠다고 했다.
“그게 얼마나 된다고….”
남자는 피식 웃었지만 싫지 않은 눈치였다.
”아이를 보다 보니 꽤 힘들더라. 그동안 힘들었겠다.“
취기가 오르자 남자가 무심한 듯 말했다. 진심이었다. 그 한마디를 기다린 듯, 재이의 마음도 따뜻해졌다.
끝.
(원고지 13.1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