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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쨈맛캔디 Apr 21. 2021

차마 하지 못한 말, '물은 셀프예요!'

알바의 추억

날씨가 쌀쌀해질 때면, 따끈한 설렁탕 국물에 시원하고 아삭한 깍두기가 절로 생각난다.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설렁탕을 먹을 때면 옛날 설렁탕집 아르바이트(알바)의 추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온다.


2001년 가을. 추석 연휴를 앞두고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극적으로 기차표를 구해 급히 고향에 내려가야 하니, 3일만 설렁탕집 홀 서빙 알바 대타를 해달라고 말이다. 식당이 고속버스터미널 역에 있다 보니, 추석 대목이라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했다. 홀서빙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재밌을 것 같았고, 특별한 약속도 없던 터에 용돈 좀 벌어볼 셈으로 흔쾌히 승낙했다.



알바 첫날


내가 할 일은 간단하다. 손님이 오시면, 자리로 안내하고 주문을 받는다. 주문서를 주방에 전달하고, 음식이 나오면 서빙하면 된다. 손님이 식사를 마치면, 빈 그릇을 모아 주방에 반납하고 테이블을 정리한 후, 다음 손님을 받는다. 이 순서를 계속 반복하면 된다. 추가로, 반찬으로 함께 나갈 깍두기와 김치, 단무지를 담아 놓는 것도 내 몫이었다. 다행히도 물은 셀프였다.



첫 손님이 오셨다


커플이 와서 3번 테이블에 앉더니 설렁탕 2개를 주문한다. 미리 준비해둔 쟁반을 들고 가서 반찬을 서빙한 후, 주방에 “3번 - 설렁탕 2개” 주문을 넣었다. 곧 김이 모락모락 나는 설렁탕이 아주 먹음직스럽게 나왔다. 내가 요리한 것도 아닌데, 맛깔난 음식을 정성스레 서빙하는 기분이 참 뿌듯했다.


따끈한 설렁탕 국물에 시원하고 아삭한 깍두기의 맛! 최고다


바로 이어, 남자 손님 3분이 그룹 지어 들어왔고, 설렁탕 2개, 도가니탕 1개를 시켰다. 앞서 한 것처럼 주문을 받고, 반찬을 내오고, 음식이 나오면 서빙했다. 음식이 뜨거우니 내려놓을 때 주의해야 한다. 도가니탕 그릇이 생각보다 무거워 무게중심을 잘 잡아야 했다. 그새 3번 테이블 커플이 다 먹고 일어나 계산 중이다. 얼른 빈그릇을 수거해 주방으로 전달한 후 테이블을 정리했다. 회전율이 생각보다 빨랐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할만하다고 생각됐다. 적당히 바쁘면 시간도 빨리 갈 테니 괜찮을 듯싶었다.


점심시간이 되기 전까지는...



점심시간이 되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순식간에 문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기 시작했다.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진다. 줄 서 있는 게 내 잘못도 아닌데, 미안한 마음에 허겁지겁 서둘게 됐다. 테이블에 자리가 나면 내가 안내할 새도 없이, 기다렸단듯이 밀고 들어왔다. 테이블이 안 치워졌는데도 일단 자리를 차지하고, 메뉴판을 달라고 한다.


2번 테이블에 메뉴판을 가져다 드리는 동안, 3번 테이블에서는 알아서 메뉴판을 가져간 후 큰 소리로 ‘설렁탕 2개! 빨리 주세요’하고 외친다. 4번 테이블에서는 깍두기를 리필해 달라고 한다. 후다닥 가져다 주려는데, 5번 테이블에서 갈비탕 대신 설렁탕으로 바꾸겠다고 한다. 줄 서 있던 한 아저씨가 왜 혼자 온 사람이 4자리 좌석을 차지하고 있냐며, 1인석으로 옮기고 자기네 그룹이 앉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한다. 6번 테이블 남자분은 "물은 셀프"라고 대문짝만 하게 적혀있는데도, 물 가져다 달라고 보챈다. 어디선가 본인이 먼저 왔는데, 옆 테이블이 먼저 나왔다고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여러 명이 자기 것을 먼저 해달라고 아우성이다.


“깍두기 리필 왜 안 해주나요?” “왜 물 안 주시나요?”


초보 알바의 새가슴으로 "손님! 물은 셀프인데요!"라고 감히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도 손이 빠른 편이지만, 동시에 밀려드는 요청에는 속수무책이다. 어느 것을 먼저 해야 할지 머릿속이 새하얗다. 이젠 누가 먼저 요청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렇게 폭풍 같은 점심시간이 광풍처럼 쓸고 지나갔다.


그토록하고 싶은 말, 하지만 차마 하지 못한말!


오후 3시. 드디어 휴식 시간이다.


바짝 긴장한 탓에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었고, 겨드랑이가 땀으로 흠뻑 젖었다. 반나절 일했을 뿐인데,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화장실 갈 시간은커녕, 배고픈 것도 못 느낄 정도로 온 신경이 마비된 것 같았다. 그런 초보 알바의 모습이 가여웠던지, 아줌마들이 웃으며 ‘처음인데 참 잘했어, 밥 많이 먹어’ 하면서 늦은 점심을 챙겨주셨다. 순간, 눈물이 와락 날 것 같았다. 미안함과 고마움, 서러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뒤범벅돼서 밀려왔다.



저녁시간이 되었다


순간의 평화도 잠시. 다음 폭풍인 저녁시간이 찾아왔다. 다행히 점심때보다는 덜 붐볐다. 저녁 손님들이 점심 손님들보다는 조금 여유가 있었다. 그렇다고 크게 다르진 않았다.


“깍두기 리필해주세요!” “물 갖다 주세요!”

이건 시간의 무한 반복이다. 다시 정신없이 밀려드는 주문의 파도 속으로 뛰어든다. 그렇게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나니, 약속한 사흘이 금세 흘렀다. 마지막 날이 되니, 어느 정도 요령도 생겼다. 깍두기를 리필하면서, 옆 테이블 물도 같이 가져다주고, 옆구리에 낀 메뉴판도 바로 전달해드렸다. 그렇게 사흘간의 알바 미션 완료 후, 두둑한 알바비를 챙길 때는 온 세상이 내 것 같았다.



미션 완료. 그리고 느낀 점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동안의 내 모습을 반추해보았다. 나 역시, 그 손님들과 별 다르지 않았었다. ‘왜 이리 늦어’ ‘왜 나 먼저 안 해줘’ 하면서, 손님의 당당한 권리라고 생각하며 참을성 없이 요구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입장이 바뀌고 나니 이제야 알 것 같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의 마음을 말이다. 그리고, 지금도 어디선가 힘든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을 식당 아주머니들과 알바분들께 무한 존경을 전하고 싶다.


아는 만큼 보이고, 느낀 만큼 안다고 했던가. 그 후 식당에 가면, 내 차례가 올 때까지 조금 여유를 갖고 기다리려고 한다. 5분 더 일찍 서빙받는다고, 설렁탕이 더 맛있는 게 나오지 않는다. 빨리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내 마음도 급하지만, 제때 서빙하지 못하는 알바의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무엇보다, 누군가 알바에게 깍두기가 먼저냐, 물이 먼저냐라고 물으신다면, 대신 말해 주고 싶다. 물은 셀프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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