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리얼 남미 대탈출기
백수가 된 여행업 종사자
어디까지 했더라....지난 글에 칠레 산티아고까지 왔었구나...
산티아고 공항 바로 앞 홀리데이인 호텔에서 손님들의 삼시세끼를 챙기면서 틈이 날때마다 산티아고 공항에 나가 동태를 살폈다. 공항 한 가득 여행객들이 바닥에 퍼질러 앉아 살길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나마 우리는 사정이 나은 편, 서울에 있는 나의 든든한 동료들이 우리 팀의 탈출을 위해 불철주야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산티아고에서 이스터 섬을 들어갔다 나와야 하는데, 이스터섬 투어를 위해서 내가 얼마나 공부를 했는데, 자연, 지리, 역사, 모아이 석상의 미스테리까지 풀어낼 얘기가 많고 많았는데...... 일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이스터섬 투어를 코앞에서 포기하자니 손님들도 그렇고 나 역시도 마음이 많이 아팠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렇게 아쉽게 돌아선 여행지는 언젠가 결코 반드시 또 오게 된다는 것을, 그러기 위해서는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3월 17일, 드디어 회사에서 오늘 저녁 마이애미행 티켓을 구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미국 드라마에서나 접했던 그 마이애미??!!!! 팔자에 없는 마이애미 바다를 보게 되는건가?!. 오늘의 목표는 안전한 남미 대륙 탈출과 미국 입국이다. 야반도주라도 하듯 짐을 챙겨 공항에 나가보니 남미 대륙을 탈출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간신히 수속을 마치고 면세점 구역안으로 들어오니 다소 안심이 된다. 비좁은 밤비행기에서 8~9시간을 버티고 나니 드디어 미국 마이애미에 도착했다.
어쨌거나 마이애미에 왔으니 해변 뷰가 멋진 호텔에 체크인하여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미국 역시 코로나 때문에 비상사태라 호텔 조식 뷔페 서비스를 비롯하여 마트를 제외한 모든 식당, 상점이 셧 다운된 상황이었다. 택시라도 이용해 마이애미의 분위기를 느껴보려고 했던 나의 야심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본의 아니게 호텔 방에 들어앉아 온갖 룸서비스와 함께 강제 휴식을 해야했다. 그래도 호텔 야외 수영장과 해변가를 거닐며 신선한 바깥 공기를 쐴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러나 코로나임에도 불구하고 마이애미 비치에 젊은 남녀가 우글거린다는 해외 뉴스를 접한 그날 저녁 마이애미 비치마저 폐쇄되었다.
이제 LA로 이동이다. 미리 어플로 예약해두었던 공항 셔틀 버스가 안오는 바람에 약간의 소란이 있었으나 급히 택시에 나눠타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마이애미도 그랬지만 LA에서는 2박을 해야하기 때문에 회사에서 호텔 선정에 고심을 많이 했다. 공식적인 단체 투어는 금지된 상황이라 개별적으로라도 안전하고 자유롭게 나들이가 가능한 곳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마이애미를 떠나 6시간을 날아가 LA에 도착하니 나의 든든한 벗, 현지 한국 가이드분이 마중을 나오셨다. 그동안은 현지 로컬가이드들과 함께했던지라 심신이 고달펐었는데, 속마음을 시원하게 털어내도 좋을 한국 동료를 만나니 천군만마를 얻은 듯 마음이 가벼워졌다. 공항에 마중나온 가이드님이 꼭 안아주고 등 한번 토닥여주니 그동안의 설움이 떠올라 눈물이 핑 돌았다.
역시 LA도 셧다운인 상황은 매한가지였으나, 든든한 한국 식당들이 대거 포진한 한인타운 덕분에 부지런히 한국음식, 간식 등을 사다날랐고, 손님 분들은 지루함을 호텔 주변 베버리 힐즈 산책으로 달래야했다.
LA에 처음 도착한 날 저녁, 가이드님이 사다주신 북창동 순두부....내 생애 가장 맛있었던 순두부찌개가 아니었을까.....
3월 21일,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홀가분하기도 하고 못다한 여정을 생각하니 아쉽기도 하고 다소 심경이 복잡했다. 좁은 호텔방에서 밤비행기 시간까지 기다리는 것은 너무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아 차를 타고 LA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평소같으면 관광객들로 붐볐을 시내 곳곳은 인적도 드물고 지나다니는 차량도 없어 마치 유령 도시 같았다. 그리도 간간히 차에서 내려 거리를 가볍게 산책할수 있어 다행이었다. LA시내 구석구석을 드라이브하고 시원한 산타 모니카 해변 석양까지 감상하고 나서 공항으로 향했다.
LA를 떠나 날짜 변경선을 통과하여 23일 이른 아침 드디어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몸은 좀 지쳤지만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사실 또한 감동적이었다. 미완으로 남게 된 우리의 남미 안데스 여행이 많이 아쉽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던 그곳의 풍경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1년 넘게 발이 묶인 요즘 작년 3월을 생각하면 정말 꿈처럼 아득하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출장의 기억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떠날 수 있어 그리고 돌아올 수 있어서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