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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너희는 아느냐... 모세의 마음을...

아찔한 출장의 기억

by 은덩

페트라에 입성하는 날..... 일기 예보가 심상치 않다.

출장을 나오면 기상변화에 민감해진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괜찮아... 즐거운 여행길이잖아.... 모든 날씨는 다 아름다워..... 는 개뿔.... 나는 안다. 햇빛이 비추는 환한 날씨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요르단의 봄은, 봄이 다 그렇듯이 변덕스러웠다. 따뜻한 봄 날씨가 계속되다가 갑자기 하필 우리가 페트라에 입성하는 날 꽃샘추위가 오는 것처럼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고 돌풍과 눈까지 예보되어 있었다. 페트라로 향하는 좁은 도로는 눈이 오면 폐쇄된다고 한다. 눈이 오든 바람이 불든 고립이 되든 말든 일단 페트라 유적이 있는 마을 안으로 들어가 있어야 했다.


페트라 유적지를 코앞에 두고 점심식사를 하기로 한다. 눈은 연신 바깥 하늘을 향하고 밥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다. 누렇게 변해가는 하늘이 심상치 않다.


페트라에서 무려 2박을 하는 우리의 일정은 '페트라 자세히 보기'가 테마이다. 최대한 다양한 각도에서, 그리고 다양한 시간대에 자세히 보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두 개의 트레일 코스를 소화하게 된다. 페트라의 상징인 알 카즈네를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알굽타 트레일과 페트라의 메인 트레일 코스인 알 데이르 트레일이다. 그리고 밤에 이루어지는 야간 페트라 공연까지 그야말로 페트라 유적지를 무한 왕복해야 하는 엄청난 도보 코스인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연령대가 다소 높은 우리 손님들을 고려하여 하루에 한 트레일은 소화해내야 했다. 결전을 앞둔 심정으로 트레킹 준비를 갖추고 유적지로 향했다. 페트라 유적 초입 약 2킬로에 해당하는 시크를 지날 때는 양쪽 절벽이 바람을 막아주는 터라 걸을 만했다. 하늘은 온통 누런색이었지만 비는 오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 카즈네를 맞이하고 허허벌판 광야로 들어서자 세찬 모래바람이 우리를 공격했다. 공격 말고는 다른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모래 바람이 사정없이 우리를 밀어붙였다. 결국 바람에 눈도 못 뜨고 바람에 휘청이다가 오늘 해야 할 일정을 시작조차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참담한 마음으로 호텔로 돌아와 체크인을 하는데 급기야 진눈깨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손님들 캐리어를 정리하는 동안 모래로 범벅이었던 내 옷과 머리 위로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캐리어 하나하나에 스티커를 붙이고 방 번호를 써야 하는데 스티커는 젖어서 자꾸 떨어지고 잔뜩 얼어버린 손은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그래도 빨리 후퇴해서 호텔로 온 것이 다행이었고 손님들은 방에 들어가 계시니 다행이었다.

신은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걸까. 이제는 헛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모세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겪었다는 혹독한 광야의 자연이 이런 것이었을까? 불평불만에 가득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데리고 도대체 모세는 어찌 이러한 광야를 40년이나 헤맬 수 있었을까?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순 없다. 방에 돌아와 머릿속 가득한 모래를 털어내며, 페트라 여행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내일 할 수 있는 건 다 하리라 다짐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다시 페트라로 향했다. 이제 기온은 더 떨어져 거의 한겨울,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핫팩과 간식을 나눠드린 후 힘차게 트레킹을 시작했다. 제법 먼 길이었는데도 예상보다 빨리 알 데이르 트레킹이 마무리되었다. 사실 너무 추워서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알 데이르 앞이었던 것 같다.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신 후 내려와 점심을 먹었다.

점심 식사 후 심기 일전하여 어제 시도하지 못했던 알굽타 트레킹에 나섰다. 오전 트레킹보다는 난이도가 좀 있는 편이었지만 잠시 파란 하늘도 맛보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알 카즈네가 생각보다 훨씬 멋있었고 또한 낙오자 없이 모두들 건강하게 하산하여 다행이었다. 모두들 다리는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모든 것을 쏟아부었기에 마음은 가벼웠다.

하루 왠종일 걸어다닌 그날...숙소로 돌아와 신발을 벗었더니!!

이틀에 걸쳐할 일정을 하루에 다 해버렸으니 내 욕심이 손님들을 너무 힘들게 한 것이 아닌가 무리가 되었을 법도 한데 모두들 웃는 얼굴로 서로서로를 격려해주셨다. 돌아오는 길, 주차장까지 마차를 타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더니 더 걸을 수 있다고 큰소리치시던 분들도 말없이 마차에 탑승하신다. 손님들은 그래도 날씨가 차서 2번의 트레킹을 하루에 다 할 수 있었다고, 이제 더 이상 페트라에 여한이 없다고 너무 좋았다고 말씀해주셨지만,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동안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거센 비로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던 카즈베기산, 비 내리던 모뉴먼트 벨리, 일정 내내 비가 왔었던 무이산 토루와 아이슬란드 여행 등 비에 얽힌 슬픈 출장의 기억과 그때 손님들의 황망한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라서 한동안 내 마음에도 비가 내렸었다.

그리고... 모세님..... 정말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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