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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 정 Dec 09. 2021

2개 국어

'넷째 아리의 편지'



아이가 말을 시작한다.

남들이 들을 때는 흔히 옹알이라고 하는 그 소리에서도 엄마, 아빠는 내 아이가 하는 단어의 표현을 찾아낸다.

분명 우리나라 말은 국어 하나뿐인데 국어 안에서도 우리는 여러 개의 국어를 찾아낸다.


나는 아이들에게 학교 가기 전 공부를 따로 가르치지 않았다.

요즘 어린이집 교육이 워낙 탄탄하기도 하지만 사실 유아기에 아이들이 공부에 치이는 게 싫어 어린이집도 놀이 위주의 어린이집만 찾아 골라 보낸다.


감사하게도 첫째 아들은 7살 반 되었을 때 스스로 한글을 뗐고 첫 학부모가 되어 참석한 입학식에서 교감선생님께서 하셨던 "한글을 모르는 아이가 있으셔도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찰떡같이 믿고 둘째도 자연히 한글을 떼겠거니 기대를 하게 된 거 같다.


기대와는 다르게 둘째는 1학년 1학기가 끝날 즈음 한글을 뗐다. 해서 1학년 1학기를 굉장히 힘겨워했다.

국어는 정말 가나다부터 가르쳐 주는데 수학은 지문을 읽고 생각하지 않으면 한 글자도 쓸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을 셋째를 학교에 보내고서야 알았다.


셋째는 코로나19가 절정이던 2020년 1학년이 되었다.

학교 간 날을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있을 만큼 온라인 수업을 많이 했다. 그마저도 zoom으로 하는 쌍방향 수업이 아닌 영상자료 시청이 대부분인 온라인 수업이었다. 덕분에 1학년 2학기 말까지도 담임선생님은 아들 이름조차도 잘 모르고 계셨다.


수업 중에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아들에게 자꾸 바르게 앉으라고 화를 내던 선생님이 두 번, 세 번 지적해도 달라지지 않는 아이에게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자 아들이 울어버렸다. 손가락 한 개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선생님이 자꾸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바르게 앉으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다른 친구랑 아들의 이름을 헷갈려 멀쩡히 앉아 있던 우리 아들만 돌부처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쨋든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 이름 숙지조차 못할 정도로 온라인 수업의 폐해가 컸던 2020년,

역시나 한글을 안 배우고 갔던 우리 셋째는 1학년 내내 한글을 떼지 못해 2학년 올라가기 전 겨울 방학에 엄마, 아빠의 애를 무척 태우며 벼락치기 한글 공부를 시작했더랬다.


그러던 중 올해 초 나는 잠시 초등학교에 근무를 하게 되었다.

우연히 1학년 수업보조를 들어가게 되었는데 아이들이 한글을 모르면 학교 자체에 흥미를 가질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됐다. 당장에 한글 따라 쓰기부터 사들고 집으로 와 넷째는 학교 가기 전 반드시 한글을 떼게 하겠다 다짐을 했다.


감사하게도 넷째는 글자에 관심이 많아 다섯 살 때부터 한글을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일단 관심이 있으니 쓰고 읽고 한참을 하고 언니 오빠가 하교 후 학습지를 하고 있으면 자기도 곧잘 앉아 공부하는 흉내를 냈다.

저러다 6살 되기 전에 혼자 한글 떼는 거 아닌가 엄마를 설레게 하더니 5살 여름이 지나자 한글에 전혀 관심을 안 갖기 시작했다. 아직 입학이 멀었으니 조급하진 않았지만 우리 집 브레인 첫째를 제치고 공부할 놈 하나 나오나 싶었는데 조금 섭섭하긴 했다.


이제 7살이 된 넷째는 기어이 6살이 지나기 전 한글을 스스로 뗐다. 가르친 적이 없었는데도 받침 없는 단순한 글자는 대부분 정확하게 읽고 '않, 깼, 끝'등 어려운 단어도 곧잘 읽어다.

읽기는 잘하는데 쓰는 건 아직 어려운지 한글에 다시 심취에 있던 6살 겨울 어느 날 맞춤법이 다 틀린 편지를 가지고 왔다.




예빤 아기 사랑해요 감사해요

엄마여겨

음신 김사해요

사랑해요 감사해요 고나우ㅏ요




임신해줘서 고맙다고 써온 따듯한 편지

맞춤법이 틀려도 다 알 수 있다.

옹알이어도 무슨 말인지 다 들린다.

사랑하기 때문에 들리는 언어는 마음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려고 하지 않으면 절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학창 시절 모두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았지만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불편함을 갖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그런 성격이란 걸 처음 알게 된 거 같고 지금은 대놓고 내가 그런 사람이란 걸 인정하게 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만했던 내 인간관계의 비법은 하고 싶은 말보다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마음이 보이고 내가 하고 싶은 말보다도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해줄 수 있다.

그렇게 오래 지내다 보니 내가 진정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잊고 사는 거 같기도 하다.


듣는걸 잘하는 나도 가끔은 상대가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줬으면 한다.

그냥 내뱉기만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듣고 싶은 말

마음을 다해 내 언어를 읽어주었으면 한다.


단어가 다르고 표현이 달라도 사랑하면 읽을 수 있는 2개 국어를 모두가 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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