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이 중한가?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바라보며

by 한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불이 난 건가?


산골 집에는 가구가 별로 없다. 언제까지 살 지 기약이 없었으므로 옮기기 힘든 짐은 만들지 않았다. 의자도 접을 수 있는 캠핑의자를 들여다 놓고 썼다.


그날도 캠핑 의자에 앉아서 창 밖의 풍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깜짝 놀랐다. 한 줄기의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맨 처음엔 어디에서 불을 피운 줄 알았다. 그런데 연기는 점점 커지고 짙은 색이 되었다. 산불이 난 것이 아닐까? 자리에서 일어나 창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연기가 피어오르는 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그것이 물안개라는 것을 알 게 되었다. 물안개가 자욱하게 퍼져 있는 것은 보았지만, 그렇게 소용돌이처럼 피어오르는 장면은 처음 보았다. 나중에 보니, 똑같은 자리에서 물안개가 날마다 피어올랐다. 물안개는 하얗고 하얀 기둥처럼 솟아나서 하늘로 올라 산등성이를 타고 널리 널리 퍼져 온 산을 뒤덮었다. 그러면 하늘은 어느새 어둑해지고, 높게 뜬 달이 세상을 또 다른 밝음으로 비춘다.


물안개는 분명히 그곳에 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면 물안개는 만져지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잠깐 있다가 금세 사라져 버린다. 그럼, 내가 본 것은 무엇인가, 내가 무엇을 본 것이 맞는가?


안개처럼 실체 없이 사라지는 지난날


내가 겪었던 모든 일이 다 물안개와 같이 느껴진다. 지나간 시간은 꿈속의 일과 같이 이미지로 저장되어 있다. 그것들이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지난날에 했던 습관과 생각에서 벗어나면,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공간과 관계 속에서 다르게 살아가고 있기에, 예전의 내가 지금의 나라고 할 수만은 없다. 내가 거쳐왔던 시간과 사람은 과거에 머물러 있고, 나에게 닿지 않는다. 다 지나고 나면 실체 없이 사라지는 것이 지난날들이다.


이런 느낌에 문득 휩싸이게 된 것은, 여러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산에 올라가기 전에 우울증에 걸려 힘들었고, 그것 때문에 앞뒤 재지 않고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되었다. 우울증에 걸리게 했던 여러 복잡한 이유가 있었지만, 친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결정타로 작용했다. 죽음을 떠올리니 삶이라는 것이 강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같이 실체가 없고 한시적이라는 생각이 강렬하게 머릿속을 두드려 대었다. 이것이 맨 처음엔 무시무시한 경고처럼 느껴졌고, 그다음엔 이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친구를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도 전혀 들지 않고, 몸도 많이 편안해졌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도 생기고, 이것저것 계산하는 습성도 되살아 났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제정신인가? 어떤 것이 제정신인 걸까? 문득 의아해진다.


삶이 물안개와 같다고 느낀다면


삶이 물안개와 같다고 생각하면 허무에 빠져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수 있다. 반면에 눈앞에 놓인 무언가에 심하게 집착하지 않게 된다. ‘곧 사라질 안개와 같은 일에 왜 목숨을 걸 것처럼 달려들까?’하는 생각이 절로 들어 사태를 관망하게 된다. 특히 나는 열정적인 성향이 있어서(?) 밖에서 들어오는 자극에 곧이곧대로 반응하고 거기에 휩싸이는 경우가 많은데, ‘언젠가 끝 날 일’이라는 관점을 갖게 되니 마구 달려들지 않게 된다.


마을에서 어떤 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분께서 얘기하길, 어떤 아는 부부가 아이에게 ‘예방접종을 시켜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가지고 오랜 시간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고 한다. 부부는 예방접종에 대한 여러 자료를 조사해 와서 자신의 입장이 옳다는 것을 주장했다.

마을 분은 이것을 보면서, ‘그 시간에 아이와 더 놀아주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결국 그 부부도 아이에게 최상의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고 건강하게 키우고 싶어서 그런 고민을 지속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정작 아이는 소외되어 있었다. 결국은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 당연한 말이 새삼 가슴속에 와닿아 무릎을 쳤다.


시간이 넉넉하고 충분하며, 심지어는 무한하다고 생각했을 때는 내가 무엇이든 다 삼키고 손에 쥘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여기에서 부르면 여기로 가고, 저기에서 무얼 해야 한다고 하면 저걸 하며 살아왔다.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호기심이 많기도 해서 말이다.

그렇게 방만하게 살아오다, 죽음을 맞닥뜨리게 되고 급격히 신체 에너지가 꺾이는 것을 경험했다. 삶은 한시적이고 금세 휘발되는 것이었다. 이 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너무나도 확실한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다 보니, 삶에 우선순위를 정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쓸데없는 데 에너지를 쓰지 말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우선순위를 정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우선순위를 정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중한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정작 소중한 것을 놓치지 말자


어떤 일에 정신을 쏟고 있을 때, 그것만이 전부라는 생각이 들 때, 문득 고개를 들어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꼭 해야 하는 일도 없고, 하지 않는다고 해서 큰 일 나는 일도 없다. 특히 다른 사람이 내가 원하는 만큼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화낼 일도 없다.

나는 왜 일을 하려는 것일까? 생계를 책임지고 있지 않는 지금, 나에게 일은 세상과 접속하는 통로이고, 세상을 배워가는 공부 과정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해쳐가면서 일을 해야 할 필요도 없고, 좋은 방식이든 나쁜 방식이든 무언가를 배웠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그렇다. 생활을 해 나가다 보면, 나의 기대만큼 따라주지 않는 아이를 보면서 답답해하고 아이에게 잘해 주지 못한 것에 안타까워하게 된다. 화와 자책이 번갈아 가면서 등장한다.

제 때에 일어나지 않거나 옷을 잘 정리하지 않을 때, 정해진 시간에 어린이집에 가지 않을 때 화가 일어난다. 원하는 대로 아이를 몰고 가기 위해 화를 내고 나면 ‘그러지 말 걸’, ‘더 부드럽게 이야기할 걸’하고 후회를 하곤 한다. 이러한 감정의 물결 속에서 ‘무엇이 중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우리가 서로 함께 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아이들에게는 화도 내고 불완전한 엄마가 ‘집에 있다’는 것이 중요할 것이고, 나에게는 집을 나섰다가 문을 열고 집으로 아이가 돌아온다는 것이 중요하다. 집에 돌아왔으니 집도 어지르고 널브러져 있기도 한 것 아니겠는가.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냥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아닐까. 더 좋은 상황에서 더 멋진 사람으로 더 잘 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생명력을 가지고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명력이 있는 동안, 나와 누군가를 살리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고, 또한 자연의 흐름에 맞춰 살다가 잘 소멸하는 것이 나의 소임일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하루가 벅차고 바쁘다.


오늘 저녁에도 여지없이 내성천 한복판에선 물안개가 피어오를 것이다. 아침이면 또 언제 있었냐는 듯이 야속하게 사라질 것이고, 또 어둑해질 무렵 기온이 내려가면 하얀 수증기 기둥이 솟아오를 것이다. 참으로 성실하게도.

어차피 안개처럼 흩어질 하루, 서두르지 말고 아쉬워하지도 말고 천천히 곱씹으며 재미있게 살아보자.




매거진의 이전글오해 좀 풀고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