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돈에 대한 역사를 다시 써 본다
우리 집은 가난했다. 부모님 양쪽 집안에는 원래 돈이 없었고, 두 분이 모두 제대로 학업을 마치지 못해 학식이 없었고, 상황이 허락하는 한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사셨다. 아버지는 가구 공장을 운영하시다가 IMF 이후 공장 문을 닫고 일용직 목수로 일을 하셨다. 어머니는 미싱 일을 하다가, 육아하며 각종 부업에 매진, 육퇴 후에는 청소노동자로 살고 계신다. 하여 우리 집에는 늘 돈이 없었다.
덩달아 나에게도 돈이 없었는데, 대학에 들어간 직후부터 용돈을 스스로 벌어 써야 했다. 대학원에 들어가서는 모든 걸 다 벌어 써야 했다. 부모님은 내가 취직하길 바라셨는데, 엉뚱하게도 공부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다 감당하기로 약속하고 공부했다. 공부를 하면서 각종 아르바이트를 했다. 서울 물가를 감당하는 것은 어려웠고, 늘 쪼들리며 월세 걱정을 했다. 돈 벌려고 강의하고, 프로젝트를 했다.
결혼을 할 때에도 돈이 없었다. 결혼하겠다고 하니까 부모님이 조금 늦추라고 했다. 결혼 자금을 마련할 때까지 미뤄달라는 것이었다. 그냥 아무것도 없이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정말 이불 한 채와 그릇 세트를 들고 시집갔다.
결혼을 하고 나니 둘 다 수입이 일정치 않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남편은 먼저 졸업을 했고, 직장을 몇 번 옮겨 다녔다. 비정규 연구직으로 몇 해를 지내다 붙박이 직장인이 된 것이 몇 년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돈이 많았던 적이 없다. 돈 때문에 긴장하고 쪼들리는 시간이 연속되었다.
이번엔 돈에 대한 기억을 다시 써보겠다.
부모님은 가난하셨지만 부지런하고 손재주가 있으셨다. 엄마는 악바리 같은 성격이라 들어온 돈을 절대 놓치지 않고 차곡차곡 모았다. 결혼한 후 14년 만에 현금을 주고 자기 집을 장만했다. 이 집에서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편하게 보냈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니, 엄마가 입학금이며 등록금, 자취방 보증금을 마련해 주고, 월세를 다달이 넣어 주셨다. 이때는 아버지의 공장이 문을 닫고 난 후였다. 아마도 부모님이 고군분투하며 돈을 모아 보내주었을 것이다. 그때는 그것을 잘 몰랐지만 말이다.
친했던 대학 동기는 부모님이 대학 등록금을 보내주실 수 없어 그것조차 다 스스로 벌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세상에 대한 불평을 쏟아 냈었는데, 그땐 그 억센 말과 한탄이 다 이해가 되지 않고 거칠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참 후에야 내가 그 친구보다 참으로 편하게 대학을 다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대학원에 들어와서는 조교 근무를 하면서 등록금 전액을 면제받았다. 조교 근무지는 참으로 운이 좋게 ‘꿀보직’인 대학 방송국이었다. 학과 조교는 주 4일 근무에 각종 행정업무가 많고 수업 보조도 해야 했다. 나는 주 2회 근무에, 오히려 학부 학생을 데려다가 가르쳤고, 학과 선배였던 교직원 형한테 밥과 술을 얻어먹곤 했다. 물론 머리 써야 하는 일과 자잘하게 신경 써야 하는 일이 있긴 했지만. 이마저도 안 하면 어떻게 하나 싶기도 하고.
모자란 부분은 대학원 프로젝트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연구비를 받았다. 이 연구비를 무려 석사 2기 때부터 박사 수료할 때까지 받았다.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학회 지원비를 받아, 해외에 나갈 기회도 많이 얻었다. 신문이나 잡지에 기사를 써서 돈을 벌기도 했다. 외부 국책 연구원의 보조 연구원으로 틈틈이 프로젝트를 뛰는 것도 수입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신기하게도 아르바이트 자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육체노동을 하는 아르바이트였다면, 시간도 많이 들고 몸도 힘들어서 학업을 병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글을 쓰는 일로 돈을 벌 수 있어서 오히려 공부를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결혼을 할 때에는 대학에서 강의를 많이 하고 있었다. 지방에 한 번 내려가면, 그곳 교수님이 미안해서 두 강의씩 묶어 주었다. 서울의 모교에도 똑같은 강의를 두세 개 묶어서 하고 있었다. 연구보고서 쓰는 일도 계속해서, 그걸로 결혼식 할 때 보탰다. 이후 남편이 졸업하기 전까지 이런 일로 벌어들인 돈을 생활비로 쓸 수 있었다. 이걸로 주말에 치맥 사 먹고, 사고 싶은 책 사보고, 생활하며 살았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남편이 취직을 해서 돈을 벌어 왔다. 하지만 내가 임신과 육아로 일을 못하게 되어서 수입이 줄고 지출할 곳이 늘어났다. 아이를 위해 따뜻한 집을 찾아서 아파트로 이사했다. 나도 박사 논문 써서 졸업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전세금 대출 이자를 내고 육아 도우미까지 고용해야 해서 비용이 늘어났다. 용케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었다. 버는 게 많지는 않았는데, 왠지 모르게 여유가 있었다.
지금은 처음 결혼했을 때에 비하면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아이를 둘이나 키우고, 월세나 카드값을 걱정하지 않고, 다달이 저축도 한다. 그동안 돈이 없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면 내 삶에서 돈이 떨어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항상 돈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돈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다 누리고 있으면서, 미래를 불안해하며 나를 위해서는 돈을 쓸 수 없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제는 돈을 다르게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있다’, ‘없다’의 수준이 아니라, ‘돈이 없어서 뭘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돈을 이용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방법을 능동적으로 찾아보는 건 어떨까.
후일담…
앞에서 돈이 없어서 유학 준비를 못했다고 했는데, 사실 일 년 동안 영어 공부에 전념했었다. 강의 한 두 개 뛰면서 월세 벌고, 나머지 시간은 모두 영어 학원에 다니는데 썼다. 문제는 시험 준비보다 진짜 영어 실력을 키우겠다며 통번역 어학원에 다녔다는 것이다. 그러니 시험 점수가 안 올랐던 것이다.
전략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중에서야 토플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하니까, 무분별하게 처음부터 중급 종합반을 끊고, 인터넷 강의도 한꺼번에 신청해서 결재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을 벗어난 난도와 양이었기에, 아직도 다 듣지 못한 인터넷 강의가 남아 있다. 돈을 엉뚱한 데 막 쓰고 다녔던 것이다. 부끄럽지만 말이다. 돈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다행인 것은, 그러한 ‘삽질’을 하면서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다. 토플 학원이 아니라 통번역 학원에 다니면서, 선생님과 굉장히 친해졌다. 아직도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이다.
당시 그 선생님은 대형 브랜드 학원에서 독립해 개인 학원을 차렸다. 생각만큼 운영이 잘 안 돼서 부침을 겪었다. 얼떨결에 나는 그 사업 과정을 그대로 지켜볼 수 있었다. 유명 학원에서는 나름 날리는 선생님이시라 자존심 세워가며 강의할 수 있었는데, 혼자 떨어져 창업하니 이전 스타일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혼자 개인 교습처럼 수업받은 적도 있었다. 그 힘든 시기에 나는 ‘프로참석러’였다. 나 또한 힘든 시기였지만, 그 선생님도 참으로 파란만장했던 시기였던 것이다. 직접 만나거나 친구로 지낸 건 아니지만 멀리 서라도 그 시절을 함께 보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이때 만났던 스터디원이 기억에 참 많이 남는다. 한 분은 스님이셨고, 한 분은 고등학생. 나보다 다 영어 잘해서 실력 향상에도 도움을 주셨는데, 그보다 인생 공부에 더 많은 도움이 되었다. 영어 학원에 다니는 해외 유학파 젊은 스님, 학교 그만두고 검정고시와 특례로 대학에 가려고 하는 고딩. 이런 조합을 어디 가서 만나 볼 수 있을까?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특별한 사람과의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