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서 사람으로

레미제라블

by 서론



프랑스의 위대한 작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퍽 흥미로운 소설이다. 일반적으로 소설의 완성도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시작, 중간, 결말을 논한다. 그러나 레미제라블은 시작만으로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된다. 그 이후에 우리가 익히 아는 장발장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첫 이야기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그는 바로 미리엘 주교다. 우리에게는 장발장에게 은 식기를 도둑맞았음에도 오히려 은촛대를 쥐어준 사람으로 익숙할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레미제라블의 뒷이야기 모두를 함축한다.


레미제라블을 이야기하며 장발장이 아닌 미리엘 주교에 초점을 두는 것을 의아해 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시작될 이야기를 잘 읽어보시라. 미리엘 주교는 프랑스 디뉴의 주교로 부임하여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주며 산다. 그는 주교관을 병자들에게 주고, 주머니에 든 돈은 언제나 약자들에게 나눠주었으며, 다른 사제들이 외면하는 사형수에게 망설임 없이 다가갔다. 그 과정에서 그의 지론은 언제나 한 가지다. 사람들에게 빛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빛은 항상 마음의 그늘을 걷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무지한 인간에게는 가능한 많은 것을 알려줘야 한다. 그들에게 무언가 받으며 가르치는 것은 죄악이다. 사회는 스스로 만들어낸 그늘에 대해 책임을 가져야 된다. 영혼의 그늘 속에서 죄인이 태어나는 것이다. 죄인은 죄를 지은 자가 아니다. 누군가로부터 그늘을 선사받은 이들이다.”


그에게 약자는 비루한 거지도 아니요, 무지렁이 농민도 아니고, 끔찍한 범죄를 지은 이들도 아니다. 그저 누군가에 의해서 마음에 그늘이 드리워진 사람들일 뿐이다. 그에게 죄란 그들을 그늘로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들이다. 동시에 미리엘 주교는 죄의 회개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인간은 그것을 감시하고 제어하고 억제하며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이 아니라면 굴복해선 안 된다. 허나 그런 굴복에 있어서도 역시 잘못은 있을 수 있으니, 그렇게 저질러진 굴복은 용서받을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추락이되 고작 무릎 꿇은 추락에 불과하므로.”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는 말이다. 그늘에 대한 책임을 모두에게 쥐어주면서 그는 죄는 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죄의 본질은 모두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이다. 요컨대 기독교의 원죄가 이에 가까운 것이리라.


"성인이 되는 것은 예외요. 사람이 되는 것은 의무다. 방종하고, 방황하고, 죄를 지어라. 그러나 올바른 사람이 되라. 가급적 죄를 적게 지는 것이 사람의 법이다. 전혀 죄를 짓지 아니함은 천사의 꿈이다. 죄는 필연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죄를 짓도록 권유한다. 그것이 사람의 길이기에, 천사의 길은 사람이 갈 수 없으니 죄를 짓되 되도록 적게 지으라는 말이다. 겸손한 주교는 우리에게 빠져나갈 길을 제시한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이고 살아간다. 이 가혹한 삶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죄를 지으며 살아간다. 그가 제시하는 한 가지 빛은 죄의 필연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작중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것은 자비로서 이야기된다. 이것은 한 국민당원 노인과 주교의 논박으로 풀이되나, 혹시라도 읽어볼 마음이 생간 이들을 위해 굳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익히 아는 이야기로 자비가 무엇으로 나타남을 알고 있다. 바로 은촛대다. 작중 주교는 자신의 유일한 사치로 은 식기에 식사를 하는 것을 즐겼다. 그에게조차 약간의 허영은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것을 장발장에게 모조리 넘겨준 후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나무 식기로 식사를 한다.


여기까지 왔다면 우린 미리엘 주교가 얼마나 놀라운 성자임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들 곁에 항상 머물고 싶어 한다. 그러나 진정 위대한 사람들 곁에는 머물길 싫어한다. 위대한 이들이 줄 수 있는 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뿐이다. 그렇기에 미리엘 주교는 항상 고독한 사람이었다. 그의 주위에 젊은 신학도들은 찾아오지 않는다. 그들이 받아갈 추천장이든 무엇이든 출세와는 하등 상관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행태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현대 사회든 혁명의 격동기든 언제나 성공은 중요한 덕목이다. 성공에 관심 없다는 이들은 엄청난 바보 던지, 아니면 몹시 위험한 위선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리엘 주교처럼 고독한 현자가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앞서서 말한 것처럼 성자가 되는 것은 예외의 일이다. 우리는 그저 하루하루 올바른 사람이 되어가기 위해 죄를 범하고 또 그 자리서 일어나면 되는 것이다.


레미제라블은 완성된 사람이 부서진 사람을 끌어올려 미완의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우리는 장발장에게 공감을 한다. 허나 그 연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어떤 것이 완성된 사람인지 작가는 우리에게 제시한다. 물론 우리 사회에 미리엘 주교 같이 완벽한 사람은 몹시 드물고 그들에게서 직접적으로 배움을 얻을 기회는 더욱 드물다. 허나 우리 주위의 사람들의 모습에서 죄를 보고 또 그 죄를 자비라는 이름으로 너그러이 용서하며 서로를 보듬고 나아간다면 충분히 그 경지에 오를 만하지 않겠는가? 비록 그 길이 완성되지 않더라도 그 삶이 충만할 것이라 믿는다. 그때 우리는 인간을 벗어나는 순간이 될 것이다. 추락하는 천사와 부상하는 유인원 사이의 사람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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