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넘게 한 경험을 이야기해드려요.
나의 첫 느낌은 ‘이게 뭐 하는 거지?’였다.
나의 어린 시절, 가족 관계, 현재의 고민 등 나의 이야기를 하다 울고 끝나기를 반복했지만 6개월을 이어갔다. 이것은 경제적, 심리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병원에 너무 가기 싫은 날에는 일부로 결석을 하려는 학생처럼 전날부터 수많은 이유를 생각했고,
‘울지 않고 상담실에서 나오기’가 상담의 목표가 되었다.
아무에게도 말 못 했던 이야기나, 나의 이야기를 내가 듣는 과정에서 나의 성격 와 비슷한 환경 속 반복되는 행동 패턴을 알 수 있었다. 비민이 보장되는 조건으로 아무에게도 말 못 했던 이야기를 함으로써, 비밀 누설에 대한 불안감보다 뱉음의 안정감이 컸다.
물론 나는 처음 간 병원에서의 심리상담사와 잘 맞았기에 가능했다.
정신과를 처음 다닐 시점이었기에, 거부감이 컸고 나 자신을 부정하는 단계였기에,
이상한 게 아니라,
몸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겁니다
그는 정환 한 인식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그 병원의 의사는 나의 삶을 이해 하기보다는 멀리서 바라보는 이었고, 관찰자일 뿐이었다. 그는 나와 같은 감정 장애인이었다.
그의 말은 항상 방어적이었고, 나를 진심으로 대하지 않아 마음에 닿을 수 없었다.
심리 상담을 통해서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상담자와 잘 상의해봐야 한다.
나는 순종적인 성격인지라, 의료진의 말을 잘 따르고 수긍을 했지만,
나의 남자 친구 레고의 경우, 억지로 감정을 끌어내려는 태도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심리적으로 불안한 이들은 작은 한 마디에도 큰 상처를 받기에 심리상담사와의 성격이 잘 맞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몇 회를 이어가지 못하고 심리상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생기거나 ‘나 , 자신이 이상하다’란 잘못된 인식이 생길 수 있다.
인간은 각자 가지고 있는 기질이 있는데 나는 우울감과 불안감 등을 남들보다 잘 느끼고 예민하다. 이 기질은 ‘평생’ 가지고 다녀야 한다. 기질적 감정을 파우치에 잘 넣어두었다가, 내가 필요할 때나 힘들 때 열어 울거나 슬퍼하다가 다시 잘 넣을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
심리 상담 한 번에 괜찮아지는 일은 절대 없으며, 진행한 지 1년 저도 된 나도 가기 전날에는 심리적 부담감으로 다가온다. 해야 하는 이유는 머리로 충분히 이해하지만 상담 내내 ‘힘듦’을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낸다. 주치의도 좋고 공간도 낯설지 않아 이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몸은 아니다. 그럼 몸이 잘못인지, 정신이 잘못인지 헷갈리기도 하고 왜 힘들어하는지 내면의 나를 보려 해도 나는 보여주지 않는다.
나는 한 달 정도를 왼쪽 갈비뼈 밑의 통증으로 아파했다. 증상은 점점 심해질 뿐이었다. 증상원 원인을 인터넷으로 찾아도 보았지만 6년이라는 시간을 거식과 폭식으로 살았으니, 위에는 ‘당연히’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불안은 확신이 되었고 결국 수면 내시경까지 했다. 하지만 내시경 직후, 그 원인 모를 통증은 사라졌고, 결과 또한 경증의 역류성 식도염 정도이지 위는 깨끗하다고 했다. 나는 그 원인 모를 고통이 사라지기까지 한 달이나 걸렸지만, 그 기간에 다녔던 많은 병원의 의사들은 정상이라는 단어만 외쳤다. 그 고통은 나 혼자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행복의 기준은 어디에 두어야 할까?
불안하고 우울하다고 해서 행복한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죽을 만큼 숨을 쉬기 힘들고 우울해서 무기력하지만, 행복할 수 있다.
사람들은 우울증에 걸렸다고 하면, 웃지도 않는 줄 안다. 나도 웃긴 것을 보거나, 귀여운 강아지 등을 보면 웃음이 난다.
-오늘 아침 조수석’ 맞춤 쿠션’ 위에서 창밖으로 얼굴을 내놓은 드라이브하는 강아지를 보고
피식 웃었다. 귀여운 걸 보는 데 어떻게 안 웃을 수가 있는가!
우울증은 내가 삶을 사는 데 생각들을 많이 바꾸고 있지만 나는 계속 우울하고 불안하고 공황장애와 길가에서 이유도 모르는 눈물을 흘린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텨간다.
좋음과 힘듦이 오는 비율이 점점 같아지는 것 같다.
힘듦이 너무 많이 오고, 견딜 수 없는 마음에 내 몸을 해하고 믿지고 않는 신을 찾아 울부짖다가도 길가에 핀 꽃이나 산책을 하는 강하지를 보면 좋음의 강점도 든다.
견딜 힘을 기르라고 하지만, 버티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싸움은 지구력의 싸움이며 계속 찾아올 것이고 버텨내야 한다. 왜 버텨야 할까?
나의 이유는 주변인에게 상실의 아픔을 주기 싫어서이다.
주치의는 말한다.
“남을 위해 살아가는 삶은 참 힘드겠어요. 나 자신을 위한 걸 해봐요”
예리코의 장미라는 식물이 있다. 이 식물은 척박한 사막에서 마른 덩굴처럼 굴러나 니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물이 스며들 때까지의 시간을 기다린다. 운이 좋게 비라도 내려서 스며들면 그사이 꽃이 피고 덩굴에 숨겨두었던 씨를 뱉고 꽃을 피운다고 한다. 이 시간은 10년~100년도 걸릴 수 있다는 데 이렇게까지 굴러다니며 수분을 찾는 이유는 생존일 것이다.
우리도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몰라도 본능적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이중적으로 든다. 자해를 해서 죽고 싶지만 이 정도밖에 하지 못하는 겁쟁이가 우습다.
이유를 만들어 산다면 살에 더 집중할 수 있겠지만 이유가 없다면 그냥 살아보는 건 어떨까?
예리코의 장미에 수분처럼, 살다 보면 우리에게도 수분 같은 이유가 찾아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