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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서영 Mar 11. 2024

스쳐 지나가는


장마 끝이라 바람이 후덥지근하게 다가왔다


아직 땡볕은 아니지만 충분히 따가운 햇빛은


눈을 찡그리게 만들어서


한 손들 들어 얼굴에 그늘을 만들었다


 


언제부턴가 여름이 와도 양산을 쓰지 않는다


귀찮고 번거로운 것이 문제다


도무지 손에 무얼 들고 다니는 게 싫어서 핸드백도 없이


달랑 휴대폰과 수첩 같은 카드지갑 하나만 손에 쥐고 다닌다


 


무엇이든 단조롭고 홀가분한 것이 좋다


마치 단축키를 누르듯이 단순하고 축소된 생활이


오히려 자유롭게 느껴진다


세상 돌아가는 일 따위는 신경 쓰고 싶지도 않다


 


굳이 세상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세상 깊숙한 곳에 살며


2차 대전이 일어났던 사실도 모르고 살았다던데


이제는 그런 사람도 신기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노인네들은


그렇게 마음속으로 세상과 동떨어져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티비에서 본 몽골족이라든가


스페인의 어느 깊숙한 산골마을의 사람들처럼


 


몽골의 밤하늘엔 별이 많았다


허허벌판에서 목축을 하며 별을 보며 고달프게 살아가도


라스베가스의 사람들 보다는 행복하게 보였던 건


나만의 착시였을까


 


순수와 물질은


어쩌면 물과 기름과 같은 관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물과 기름 모두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중 한 가지를


종종 잊고 살 때가 있다


그렇게 한 가지로만 치우쳐서 메마른 사람들


그런 걸 생각하면 슬프다


 


기다리던 버스를 타고 가는데


에어컨이 추웠다


아프리카 난민들이 생각났다


왜 세상은 이리도 모순덩어리인지


차창 밖으로 스치는 광경들이 순간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여기 있는 나와 아프리카 난민들과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또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지


밤하늘의 별들은 다 똑같은 것 같은데


 


멍 때리다가 정류장을 지나칠 뻔하였다


추운 버스에서 내리니 후끈 밀려오는 후덥지근한 공기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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