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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Apr 02. 2023

스스로 말하게끔 만들기

23.04.02. 이동휘, 이여로 -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


주말에 간만에 책을 읽는다. 재닛 맬컴의 <기자와 살인자>를 저널에 낼 용도로 다듬는 데 한낮을 다 보냈다. 재고를 검토할 친구에게 보내놓고 나니 집에 들어가기엔 시간이 살짝 떠서, 같이 들고 온 이동휘,이여로의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 : 예술, 언어, 이론>을 읽는다. 책이 책에서 시작하지 않고 책이 책으로 끝나지 않아서 좋았다.(편집자는 이 책을 연속된 논쟁의 한 가운데에서 길어올렸고, 그에 필요한 최소한의 단락 조치만 해냈다)


예전부터 항상 고민하던 바인데, 뭐가 예술이고 뭐는 예술이 아닌가에 대해 명쾌한 구분이 있는지 궁금했었다. 그에 대한 명료한 기준을 찾느라고 꽤 오랜시간 헤멘 것 같은데, 정작 그 사이에 나는 이론 애호가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런데 그게 꼭 내 잘못이라기보다는, 예술 이론은 난해하고 그것엔 필연적인 이유가 있으며 보통 그게 누구에게나 그렇다는 설명이 좋았다.


예술은 좀 독특한데, 그것이 사적이기 때문이다. (예술'만'이 사적이라는 게 아니다) 같은 물건에 대해서도 사람 by 사람으로 달리 볼 수 있다. 그럼 애초에 자기 마음대로 보면 된다는 건가? 최종적으로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해석은 없을 뿐, 납득을 추구하지 말라는 건 아니다. 함부로 게을러질 이유는 없지.


참조할 수 있는 수많은 해석들이 있지만, 그것이 온당한지 아닌지에 대해선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예술에 대해 말하고 있는 바는 또 어느 정도 '옳아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 역시 그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므로. 여기서 내 말을 옳다 그르다는 이유로 기각하거나 인용하는 건 예술에 대해서라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해석을 하는 과정이 '예술'이라는 게임의 핵심이다. 사적 해석을 공적 옳음으로 전환하려는 '시도' 그 자체가 핵심이다. (분투형 플레이가 추구하는 '고투'처럼) 내가 발견한 '예술작품성'을 납득시키려는 시도가 예술에 대해 말하기인 것이다. (예술의 본성은 몰라도 상관없다)


그러니 예술 이론(즉 예술작품성을 납득시키기)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개인의 경험을 타인에게 납득시키는 일이 쉽나? 이론의 밑바닥엔 이론가의 경험이 있는데, 이게 합당한 해석인지 곧바로 이해가 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걸 '이해했다' 치고 넘어가면 예술 이론의 타당성은 검증이 불가능하다.


어떤 이론가들은 중세시대 성직자들의 권위를 누리고 싶어할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의 이론은 그 자체로 난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쉽게 쓸 수 있다면 쉽게 쓰려고 했을 사람들도 쉽게 쓸 수 없는 건 경험 자체가 그렇게 쉽게 표현이 안 되는 것이라서 그렇다. 당신이라고 다를 것 같은가? 하지만 좌절할 이유도 없다.


이동휘는 예술이론성의 조건을 1) 예술이론들의 언어를 배열에 포함할 것 2) 그것을 대조할 것으로 간소화한다. 그리하여 자신과 같은 목적을 가진 다른 이론 언어들과 비교하고 차이로부터 의미를 찾아낸다. 이것은 예술이론에 쓰기 대한 부담감을 극단적으로 경감시킨다. (이건 마치...야나두?)


책이 담고 있는 바가 이것만은 아니나, 내가 주워 담은 것은 이정도이다. 예술이 사적이라면 누가 무엇이 예술인지 가르쳐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동시에 이것이 예술임을 '설명'할 수 있고 '납득'시키려면 스스로 느끼고, 말하고, 이해를 위해 싸워야 한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쓰였다.


예술 이해를 위한 가이드를 주는 책은 아니다. 감상의 방법이나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은 더욱 아니다. 가치를 스스로 찾아내길 요청하는 책이다. 내가 길어올린 바가 다른 사람의 독서에 도움이 될런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말하게 한다는 점에서 지독한 책이다. 그래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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