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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Apr 20. 2023

쉬운 것만 자꾸 하려고 하지

23.04.20. 패트리샤 로버츠-밀러, 선동은 쉽고 민주주의는 어렵다

<선동은 쉽고 민주주의는 어렵다>를 읽는다. 대통령의 4.19 기념사에 분노가 일었기 때문이다. '사기꾼'이라는 단어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초석을 닦은 운동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말인지 의심스러웠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이의 언행일까?


책 내용이 두께와 크기에 비해 꽤 알차다. 선동을 '거짓'에 결부된 무언가가 아니라, 사고의 구조로 이해하는 바가 흥미롭다. 생각보다 선동가들은 자신의 말을 진실이라 믿는다. 그들에게 '거짓'은 어쩌면 한 톨도 없다. 문제는 그 말의 밑바닥에 놓인 이분법적 사고 방식이다. 적과 우리.


우리 편이면 옳다 즉 논리로서의 정체성이 모든 것에 앞선다. 어떤 집단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내 말이 논리적 정합성을 획득한다면, 그 때부터 '사실'은 큰 힘이 없다. 그 사람의 말이 옳으냐 그르냐의 여부는 우리 편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소수만 저지르는 실수가 아니다.


선동적 사고(나는 이렇게 부르는 게 좀 더 명쾌할 것 같다)는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동원하기 위해선 단순화, 이분화의 기술이 필요할 때도 있다. 문제는 이것이 공적 담론의 발화에 있어서 규범이 되고, 유행이 될 때다. 우리를 둘러싼 복잡한 문제를 단칼에 푸는 사이다로서.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겠다는 선동가들은 자신이 알렉산더와 같은 존재라고 믿는 듯하다. 그들은 칼을 휘둘러 매듭을 잘라내고 의기양양하다. 하지만 나는 그 매듭을 풀어 다른 데 쓰려고 했지 잘라달라고 하진 않았다. 이것을 문제의 '해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버려진 끈들이 나풀대는 황야, 지금 우리가 그 곳에 있다. 난자수참(亂者須斬)을 이야기한 북제의 문선제는 폭군이었다. "미묘한 차이를 분석하는 TV 프로그램은 분노를 유발하는 동시에 즐거움을 주는 프로그램과 경쟁할 수 없다."는 문장은 지금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절망처럼 느껴진다.


대안적 세계들의 각축장, 그 속에서 건강한 비판을 만들어 낼 프로그램은 존재할 수 있는가? 시청률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대에, 보지 않는 프로그램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리고 아무도 공적 담론의 발화에 있어 이를 참조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의 무기고로서 저널리즘은 그 의미가 다한 것은 아닐까?


우리와 그들은 전쟁을 치르고 있고, 그들과의 타협은 곧 패배이며, 그들을 절멸시키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는 생각은 메트로놈처럼 이쪽과 저쪽의 선동가들을 번갈아가며 공평하게 먹여살릴 것이다. 허나 선동은 단순하고 쉽지만, 선동에 대항하는 것은 복잡하고 어렵다.


저자는 1) 선동의 수익성을 감소시키기 2) 선동적 주장을 반복하는 이들과의 싸움을 중지시키기 3) 가치 있는 논쟁을 시도하기 4) 민주적 숙의 지지하기를 선동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내세운다. '이게 쉬웠으면 선동은 애저녁에 사라졌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3)은 리 매킨타이어의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을 떠올리게 하는데, 심도 깊은 대화의 결과도 사실 그렇게 성공적이지 않았음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어려울 지 짐작이 갈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반대, 불확실성, 복잡성, 실수"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다루는 유일한 제도인 한 '좋은 반대'를 어떻게 제도 내로 끌어들일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모든 이들을 협잡꾼이나 사기꾼으로 묘사하기 이전에, 스스로가 민주주의 제도 안에서 공적 담론을 발화하는 데 얼마만큼 '민주주의적'인지를 고민해 봐야 하듯이.


이 책을 읽으면서 슈미트로부터 유래하는 적과 우리의 다양한 변종들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데, 선동 그 자체는 어쩌면 민주주의 체제가 반드시 품을 수밖에 없는 내적 요소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것은 제거 불가능하다. 본질의 한 부분일 수 있다.


저자도 선동가를 '절멸'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 듯하다. 또한 선동이 때로는 필요할 수 있다는 데에도 동의한다. 바로 그 '때로는'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이 좌파 포퓰리즘 사유의 밑바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마치, 곰팡이로 누룩을 만들듯이? 그럼 무엇이 '필요한' 선동일까? 글쎄... 어쩌면 박상훈의 <정치적 말의 힘>을 다시 읽어봐야 하는 때인지도 모르겠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게 만든 연설들은 어쩌면 그 답을 알려주지는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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