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학준 Jul 24. 2023

불꽃의 방향을 우리는 모른다

23.07.24. 이토 마사아키, <플레이밍 사회>


이 책은 일본 사회에서 '플레이밍' 현상이 왜 일어나고 있고, 이 현상을 통해서 일본 사회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원고들의 묶음이다. (여러 곳에 기고한 원고를 묶은 책은 필연적으로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소셜 미디어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비난과 비방을 목적으로 글들이 빠르게 올라오고 퍼지는 현상인 '플레이밍'은 201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는데, 저자는 이 현상의 근본에 가로놓인 세 가지 조건들을 간명하게 추려낸다.


하나는 일본 사회에 고유한 특징으로서, 튀는 사람에 대한 압력이다. 비슷하지 않은 사람에게 가해지는 공동체 차원의 감시와 제재는 오래된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반복해서 재현되고 있다. 국가가 인구를 동원하기 위해 자숙이라는 행동 통제 수단을 사용한 건 이미 1940년대에도 있었던 터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왜 갑자기 '플레이밍'이 늘어났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적 주체관의 내면화라는 조건으로 이를 설명하려 한다. 사회는 없으며, 노조나 복지에 기대는 것은 무책임하고, 개인은 공정한 경쟁에 참여하여 그 이득과 손해를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주체관은 전근대적인 일본 사회를 개혁하는 입장처럼 여겨졌다. 이들 신자유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은 2000년대 초반에는 개인의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정치권에서 주로 들렸다면, 2010년대 '개혁'이 자리잡은 후로는 일반 시민들도 비슷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은 스스로 책임질 것, 그렇지 않다면 그를 제재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라는 태도가 보편화된 것이다.


이 태도를 전면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통로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2010년대 전후로 활성화된 소셜 미디어는 자기 연출의 시대를 활짝 열어젖혔지만, 그 연출의 한계나 부작용에 대한 논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연출의 규범은 시행착오를 필요로 했다. 하지만 드러내기와 평가하기로 이루어진 소셜 미디어 공간은 필연적으로 과도한 연출과 과도한 비난을 유발한다. 한 번 불꽃의 힘을 맛본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를 넘어서서 TV나 광고 매체, 정치인의 언설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를 유지하게 된다. 그것이 오늘날 일본 사회에 만연한 '플레이밍'의 조건이라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이 책은 플레이밍 사회에 대한 본격적 분석이라기보다는,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한 스케치에 가깝다. 각각의 원고에서 중복되는 내용들도 보이고, 서로 긴밀하게 엮이지 않은 내용들도 있다. 앞서 '플레이밍' 사회의 일본 고유의 조건들을 탐색한 원고와 미국, 유럽, 중동에서 발생한 보편적 사회현상으로서 해시태그 운동의 역할을 설명하는 원고는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더욱이 BLM의 발생에 가로놓인 미국 사회의 차별 구조나 미투 운동을 촉발시킨 뿌리깊은 젠더 불평등을 언급하지 않고 곧바로 회전초밥집 간장 테러에 대한 분노 반응과 한데 묶는 것은 과도하게 편의적이다.


풍자는 권력이 있는 자들에게 향해야 성립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방향성을 상실하면 SNL과 같은 약자 혐오가 되듯이, 플레이밍 현상이 저자가 바라는 대로 긍정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으려면 방향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현존하는 차별적 구조에 대한 저항이어야 하고, 권력이 없는 자들이 취할 수 있는 수단일 때에만 유의미하다. 그렇다면 모든 '불타는' 것들을 하나로 묶기보단 어떤 방향으로 불이 타오르게끔 할 것인지를 물었어야 하지 않을까. 커넥티브 액션은 콜렉티브 액션과 함께하지 않고서는 사그러들 불이라는 사실도 지적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예컨대 '진상 민원'은 방향성을 상실한 플레이밍의 한 사례일 수도 있을 것이다. 본인의 과도하고 무례한 요청을 정상적으로 거절한 이를 온라인 상으로 고발하고 괴롭히려는 시도 속에서 누가 강자이고 누가 약자인지 판별하는 것은 어렵다. 그 시야 확보의 어려움이 플레이밍을 부추긴다. 내가 약자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도 보장할 수 없으므로 자신의 갑질도 약자의 저항으로 뒤바꿀 수 있는 것이다. 이 불꽃이 제대로 된 방향으로 피어오르고 있는지 판별할 수단이 우리에겐 아직 없다. 아마 이런 부분을 조금 더 면밀하게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을 책에서 확인해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그럼에도 생각해볼 지점들이 많은 책이다. 일본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닮았는지 확인해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간 눈 앞에 스쳐 지나간 다양한 불꽃들이 다시 어른거린다. 아직도 우리는 불꽃의 방향을 어떻게 당겨야할 지 잘 모르는 게 아닐까.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매거진의 이전글 조심하는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