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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Jul 23. 2023

조심하는 마음

230723

  한밤중에 잠깨어 신형철의 책을 읽는다. <인생의 역사>. 몇번째인지 셈하지는 않기로 하자. 그저 신새벽 푸른빛에 기대 문장 하나하나를 더듬어 본다. 어쩐지 경전 같다.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걸까. 하기사 삶의 의미를 알고 싶다는 간절함이 아니었다면 누가 백번 천번 성경을 되뇌었으랴. '인생'과 '역사'라는 단어가 새삼스럽다.



  오늘은 책 속 일부 문장에 눈길이 갔다.


  그러나 '나는 불행하다'고 말하는 그 시인의 성별이 여성이라면 그 점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강조하는 편이 옳겠다는 생각을 한다. 설사 당사자가 자신의 고통을 '존재 일반'의 그것으로 규정한다 할지라도, 읽는 사람 쪽에서는 고통에도 성별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되새겨야 한다는 뜻이다. 평론가 김현이 "최승자의 시는 사랑받지 못한 사람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다"(<말들의 풍경>)라고 말하면서 '여자'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적은 것은 '여성성'과 '여성시'에 대한 당대의 태만한 규정 안에 그를 가두지 않으려는 배려였겠으나 그와 더불어 생각해야 할 것은 고통의 성별을 지우면 고통 자체가 왜곡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배려'라는 단어가 절묘하다. 선배 평론가의 평과 갈라서면서도 날세우지 않으려는 마음이 느껴져서다. 토막내는 대신 적셔서 천천히 떼어내는 모습 같달까. 문단의 첫머리에 놓은 '생각을 한다'도 마찬가지다. 앞 문단의 문장 "한 시인의 삶이 객관적으로 보기에 불행한 편에 속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타인이 주관적으로 확언하는 말을 하는 것은 부주의한 일이다"가 이미 주의깊은 말인데, 이를 뒤집으면서도 신형철은 재차 자신을 낮춘다. 뒤집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면 이 글을 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방식이 꼭 자신을 앞세우는 모습일 필요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으리라. 한번이 아니라, 대부분의 글에서 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근조근하게 들린다('소견'이란 말의 한자어를 흔히 '작을 소'로 착각하는데, 어쩐지 신형철의 경우엔 적절한듯 여겨진다).

  시인의 작품에 대한 그의 태도도 다르지 않다. 많은 학자 내지 평론가들이 태작으로 꼽는 최승자의 90년대시와 김수영의 시편 '봄밤'을 두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연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시는 아닌데, 특별히 분석할 게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시의 문장이 쉬워도 시인의 마음이 쉽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나는 21세기의 최승자에 대해서도 그가 출간한 세 권의 시집보다는 그의 육체적, 정신적 안부에 더 관심을 갖는다. 그러니까 그가 사랑을 받고 있느냐하는 것 말이다. 그 대상이 가족이건 신이건, 그가 '존재론적 정착'에 성공했기를 바란다. 시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사랑을 얻었으면 그만이다. 최승자는 언제나 살기 위해 썼지 쓰기 위해 살지 않았으니까.


  그저 연민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좋은 시는 좋다는 이유로, 나쁜 시는 시인의 몸과 마음을 염려하며 읽어내기에 그는 독창적인 분석으로 나아간다. 정치적 시인이던 최승자가 신화적인 시를 써냈을 때 대부분은 그가 80년대란 역사적 시간성에서 벗어나 길을 잃었다고 평했다. 신형철의 평은 "시인 자신에게는 미학적 목표보다 치유적 목표가 더 중요했으리라"는 것이었다. 김수영의 시행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는 그에게 글쟁이 내지 사회적 자아를 향한 조언으로 읽힌다. 신형철은 "이런 백발백중은 좀 신기하다. 그만큼 내가 언제나 '바쁠 필요가 있는' 또 '애타도록 서두르고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이리라"라고 자기진단하고 "(덕분에) 내가 조급하게 쓴 어떤 문장들을 지워버릴 수 있었다.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결국 '혁혁한 업적'을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고 회고한다. 글이 꿈꿀 수 있는 최상의 목표가 독자를 돌아보게 하고 달리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라 할 때, 신형철의 평 속에서 김수영은 범작으로 걸작을 뛰어넘는 기인이 된다.

  김시습 평론을 읽다가는 살짝 눈물이 났다. 삶이 글을 만들어내지만, 때로는 글이 삶을 안아주기도 한다는 것을 절감한다. 자기 삶을 다독이는 글은 많지만, 잘 모르는 이의 생을 위무하기란 어려운 법이어서 더 빛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기왕 살 것이라면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끔찍한 욕망이 내 안에 있다는 발견에서도 올 것이다. 세상이 생육신의 지조를 칭송하면 할수록 그는 제 안의 잠재적 배신자와 지긋지긋한 싸움을 해야 했으리라. 싸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기혐오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이후 세조를 관례적인 문장으로나마 치하하기도 했고, 국가 주도 불경 언해 사업에도 참여했으며, 세조에게 도첩(度牒, 승려 신분증)을 받아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받기도 했다. 이를 두고 변절이라고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조금 흔들렸다고 상상해볼 수는 없을까.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흔들리다 부러지지는 않았다. 그 무렵에 그가 또 한 번 똥통에 들어갔다 나온 것은 밖의 더러움으로 안의 더러움을 씻어내기 위한 제의였을지도 모른다. 이어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겠다는 시를 써서 세조에게 보냈고 그 후로도 내내 그가 지켜야 할 약속을 지키며 살다 죽었다. 아홉 살 때 자신을 알아봐준 어진 임금 앞에서 한 약속, 어린 임금이 쫓겨나고 끝내 살해될 때 통곡하며 한 약속, 책을 태우고 머리를 깎고 미친 척을 하면서 한 그 약속을, 양생이나 이생처럼, 지켜냈다. 평생을 두고 지켜야 할 약속이 있었으니 그의 생은 내내 고달팠겠으나 단 한순간도 무의미하지는 않았으리라.


  대체로 따뜻한 그의 어조가 불현듯 변하는 순간은 문장이 그 자신을 향할 때다. 냉랭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철저하다(이 단어에 담긴 차가운 뉘앙스까지는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윤동주, 나희덕, 메리 올리버에 대한 평론과 서문에서 그러한 시선을 조금 엿본다.


  나는 자연에서 배운 것이 별로 없다. 자연의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수업에 관한 한, 나는 스스로를 반항아라고 믿는 열등생에 불과했다. 자연이 제공하는 평범한 지혜에 과도하게 감격하는 장년층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들을 은근히 무시해온 때가 있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좋지 않은 것’이라 속단하는 풋내기 시절을 벗어난 지금은 자연에 대해서도 겸허해졌다. 앞으로 나와 자연의 관계가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다. 지난 40여년 동안 자연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으나 머지않아 눈과 귀가 열릴까.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그러니까 아직은, 메리 올리버 같은 시인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의 시 한 편을 나는 내 식대로 좋아해 왔다.


  윤동주의 ‘최후의 나’는 등불을 들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1945년 2월16일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었다. 그는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적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라는 어정쩡한 표현에는 아직 인생을 제대로 살아본 적도 없다는 겸손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는 시를 쉽게 쓴 것이 아니라 인생을 어렵게 살았다. 자신을 넘어서려는 노력, 결국 ‘최후의 나’에 도달하려는 노력, 그것이 그를 죽게 했고 영원히 살게 했다. 나는 그의 문장을 반대로 뒤집어 나에게 읽혀야 한다. ‘시는 쓰기 어렵다는데 인생이 이렇게 쉽게 살아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조금은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시를 읽는 일에는 이론의 넓이보다 경험의 깊이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겪으면서, 알던 시도 다시 겪는다. 그랬던 시들 중 일부를 여기 모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이 책의 가장 심오한 페이지들에는 내 문장이 아니라 시만 적혀 있을 것이다.


  나는 시인으로부터 배운 것을 나에게 가르쳐둔다. 가르쳐도 아직은 그 깊이를 모르는 지금의 나에게.


  책을 다 읽고 첫머리를 재삼 들춰보니 '조심'이라는 한자어가 눈에 들어온다. 뜻을 풀면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 신형철은 "새를 손으로 쥐는 일은, 내 손으로 새를 보호하는 일이면서, 내 손으로부터 새를 보호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쓴다. 그는 막 태어난 자신의 아이 '신기룬'을 떠올리며 이 글을 썼다지만, 그가 문학을 대하는 태도 역시 같지 않았을까.

  자신에게 냉철하고 타인에게 따뜻한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들 하지만, 그렇게 실천하는 사람을 직접 본 적은 없다. 신형철은 그 어려운 일을 글에서 해낸다. 스스로 "읽고 쓰는 일은 내 삶의 거의 전부"라고 이야기한 적 있으니, 그렇게 사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그가 사랑받는 이유를 알겠다.   




p.s. 내가 사랑하는 신형철의 글이 또 생각나 부기한다. 그가 화자의 의도를 추측할 때 나는 그의 분석력과 섬세함에 놀란다. 같은 글을 읽고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감탄하고, 이렇게 조심스럽게 헤아릴 수 있나 숨죽인다. 어디까지나 '추정'(미루어 생각해 판정하다)이 아니고 '추측'(미루어 생각해 헤아리다)이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302968?sid=103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309430?sid=103


p.s.2. 이 책의 프롤로그 "조심,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에 대하여"와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를 다룬 「모두가 사랑하고 대부분 오해하는」, 전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속 "덧없음에 대한 토론"을 이따금 생각한다. 신형철은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세 단계를 차례로 밟아가는 일이다. 그 세 단계를 각각 ‘주석’ ‘해석’ ‘배치’라고 명명할 수 있다. 우리는 우선 텍스트가 다루고 있는 것들의 ‘사실’ 관계를 확인해야 하고(주석), 확인된 사실에 근거해서 텍스트의 ‘의미’를 추론해내야 하며(해석), 이렇게 추론된 의미가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평가하면서 그 텍스트가 놓일 가장 적절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배치)"( 「세상의 종말보다 더 끔찍한 것」), “‘주석’이 필요한 대목에서 ‘해석’을 시도해서는 안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아니라 전문가가 알려주는 ‘사실’이다”(「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의 황제」) 같은 문장을 쓴 적이 있는데, 거론한 세 편 글 속에서 그는 새로운 사실로 독자의 눈을 번쩍이게 하고 우아하게 배치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323951?sid=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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