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23
그러나 '나는 불행하다'고 말하는 그 시인의 성별이 여성이라면 그 점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강조하는 편이 옳겠다는 생각을 한다. 설사 당사자가 자신의 고통을 '존재 일반'의 그것으로 규정한다 할지라도, 읽는 사람 쪽에서는 고통에도 성별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되새겨야 한다는 뜻이다. 평론가 김현이 "최승자의 시는 사랑받지 못한 사람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다"(<말들의 풍경>)라고 말하면서 '여자'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적은 것은 '여성성'과 '여성시'에 대한 당대의 태만한 규정 안에 그를 가두지 않으려는 배려였겠으나 그와 더불어 생각해야 할 것은 고통의 성별을 지우면 고통 자체가 왜곡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연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시는 아닌데, 특별히 분석할 게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시의 문장이 쉬워도 시인의 마음이 쉽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나는 21세기의 최승자에 대해서도 그가 출간한 세 권의 시집보다는 그의 육체적, 정신적 안부에 더 관심을 갖는다. 그러니까 그가 사랑을 받고 있느냐하는 것 말이다. 그 대상이 가족이건 신이건, 그가 '존재론적 정착'에 성공했기를 바란다. 시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사랑을 얻었으면 그만이다. 최승자는 언제나 살기 위해 썼지 쓰기 위해 살지 않았으니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기왕 살 것이라면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끔찍한 욕망이 내 안에 있다는 발견에서도 올 것이다. 세상이 생육신의 지조를 칭송하면 할수록 그는 제 안의 잠재적 배신자와 지긋지긋한 싸움을 해야 했으리라. 싸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기혐오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이후 세조를 관례적인 문장으로나마 치하하기도 했고, 국가 주도 불경 언해 사업에도 참여했으며, 세조에게 도첩(度牒, 승려 신분증)을 받아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받기도 했다. 이를 두고 변절이라고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조금 흔들렸다고 상상해볼 수는 없을까.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흔들리다 부러지지는 않았다. 그 무렵에 그가 또 한 번 똥통에 들어갔다 나온 것은 밖의 더러움으로 안의 더러움을 씻어내기 위한 제의였을지도 모른다. 이어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겠다는 시를 써서 세조에게 보냈고 그 후로도 내내 그가 지켜야 할 약속을 지키며 살다 죽었다. 아홉 살 때 자신을 알아봐준 어진 임금 앞에서 한 약속, 어린 임금이 쫓겨나고 끝내 살해될 때 통곡하며 한 약속, 책을 태우고 머리를 깎고 미친 척을 하면서 한 그 약속을, 양생이나 이생처럼, 지켜냈다. 평생을 두고 지켜야 할 약속이 있었으니 그의 생은 내내 고달팠겠으나 단 한순간도 무의미하지는 않았으리라.
나는 자연에서 배운 것이 별로 없다. 자연의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수업에 관한 한, 나는 스스로를 반항아라고 믿는 열등생에 불과했다. 자연이 제공하는 평범한 지혜에 과도하게 감격하는 장년층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들을 은근히 무시해온 때가 있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좋지 않은 것’이라 속단하는 풋내기 시절을 벗어난 지금은 자연에 대해서도 겸허해졌다. 앞으로 나와 자연의 관계가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다. 지난 40여년 동안 자연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으나 머지않아 눈과 귀가 열릴까.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그러니까 아직은, 메리 올리버 같은 시인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의 시 한 편을 나는 내 식대로 좋아해 왔다.
윤동주의 ‘최후의 나’는 등불을 들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1945년 2월16일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었다. 그는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적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라는 어정쩡한 표현에는 아직 인생을 제대로 살아본 적도 없다는 겸손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는 시를 쉽게 쓴 것이 아니라 인생을 어렵게 살았다. 자신을 넘어서려는 노력, 결국 ‘최후의 나’에 도달하려는 노력, 그것이 그를 죽게 했고 영원히 살게 했다. 나는 그의 문장을 반대로 뒤집어 나에게 읽혀야 한다. ‘시는 쓰기 어렵다는데 인생이 이렇게 쉽게 살아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조금은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시를 읽는 일에는 이론의 넓이보다 경험의 깊이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겪으면서, 알던 시도 다시 겪는다. 그랬던 시들 중 일부를 여기 모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이 책의 가장 심오한 페이지들에는 내 문장이 아니라 시만 적혀 있을 것이다.
나는 시인으로부터 배운 것을 나에게 가르쳐둔다. 가르쳐도 아직은 그 깊이를 모르는 지금의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