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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ul 28. 2023

책임자 없는 재난

23.07.28. 더 데이즈(2023)


<더 데이즈>를 봤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의 발생과 수습 과정을 담은 8부작 드라마다. 연기력 높은 야쿠쇼 코지가 당시 원자력 발전소 소장인 요시다 마사오 역할을 담당했다. 덕분에 소장은 평범하지만 강단 있는 영웅으로서, 재난을 최대한 수습하여 그 규모가 국가적 수준으로 퍼져나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 인물임이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일본의 보수적 분위기를 감안할 때, 미래를 생각하지 않은 발전 중심적 사고에 대한 자기 비판이나 민심에만 신경쓰는 관료와 그런 관료의 눈치만 보는 기업 간부들 대신 현장에서 생명을 걸고 사고를 수습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내용으로 드라마를 찍었다는 것 자체는 고무적이다. 야쿠쇼 코지가 7월 5일 일본 외신기자클럽과의 인터뷰에서 이 대본대로라면 통과되지 않았을 거라 언급한 것은 이런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그날 벌어진 사건을 사실상 자연 재해의 일부로 해석한다. 예측할 수 없는 재난 앞에서 경험이 없는 이들의 서투른 대응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한 이들의 고투에 집중한다. 사고가 벌어진 이후 제 살 길을 찾느라 바쁜 윗분들과, 재난 직후 도망갔다는 억측으로 조롱받았던 노동자들의 죽음에 무너지는 소장을 대비시키며 책임 소재를 고민하는 듯 하다가도 결국 모두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사고에 직면하는 모습으로 회귀한다.


누구 한 명의 잘못이라 말할 수 없으며, 동시에 우리 모두는 실수를 하는 사람들이므로, 벌어진 결과에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식의 태도가 드라마의 바탕을 이룬다. 일본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던 때에 수요에 발맞추어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후쿠시마에 원자력 발전소를 지었고, 원자력 에너지의 위험보다 이것이 가져다 줄 값싸고 대량 생산이 가능한 에너지의 효과에 기대를 걸었으며, 끝내 사고가 일어난 후 이를 수습하기 위해 수십년의 시간을 들여 후손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에필로그의 목소리는 진지하다. 하지만 거기에 어떤 책임의 주체가 있는가?


포스터에 적힌 것처럼, 이 사고는 자연 재해였으나 동시에 인재이기도 하다. 파도를 막는 제방의 높이를 낮추기로 결정한 것도 사람이고, 변전실을 건물 지하에 두기로 결정한 것도 사람이며, 제대로 된 정보를 뭉개서 정부의 대응을 지체시킨 것도 사람이다. 그럼에도 총리도 진심이었고, 부사장도 회사와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소장도 죽음을 감수하고 사고를 억제했다면 남는 게 무엇인가? 눈물겨운 동료애를 걷어내고 나면 반성을 위한 자리는 남아나지 않는다.


드라마는 명시적으로 책임 소재를 찾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소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두 주체가 있다. 관료와 여성이다. 간 나오토를 떠올리게 하는 아즈마 신지는 신뢰가 없고 쉽게 흥분하는 타입이다. 즉흥적으로 현장을 방문할만큼 인내심이 없다. 그의 표정은 주로 초조와 불안으로 가득하며, 미국 대통령에게는 굴욕적인 태도를 취한다. 윽박지르기, 불안해하기, 경거망동하기, 거짓 발표하기는 관료의 몫이다. 


하지만 당시 민주당은 자민당으로부터 정권을 탈환한 지 채 2년이 지나지 않은 상태였고, 간 나오토는 하토야마 유키오가 9개월만에 퇴임하고 그 뒤를 이어 총리가 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던 터다. 만년 야당이었기에 기업 간부들이나 공무원에 대한 통제력은 자민당에 비해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도 총리를 믿지 않았고 총리 역시 이들과 친화력을 발휘할 시간이 없었다. 심지어 도쿄 전력은 총리실에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사고 발생 이후 7시간 가까이 도면도 제공받지 못했고, 발전차량을 수배하는 건 간 나오토가 직접 담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총리의 행동마다 일선 현장의 야유를 덧붙인다. 그것은 정당한 대우라기보다 정부 관료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의 불신을 투영하여 조롱하는 것에 불과하다. 


여성은 더욱 처참하다. 적어도 총리는 종종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최선의 방법은 아닐지언정 국민을 생각한 결정을 내리고, 합리적인 소장의 설명을 듣고서는 물러날 줄 알며, 현장에 가는 나름의 이유를 합리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에서 면제된다. 하지만 여성은 아예 책임으로부터 자유롭다. 책임을 질만한 위치 자체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시다 유리코는 처음부터 끝까지 종이학만 접다가 아들의 관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릴 뿐이고, TV에 등장하는 여성 저널리스트는 거짓된 정보를 바탕으로 헛소리를 퍼트리며 잘 되어가던 미국과의 협력 관계를 위기에 빠트린다. 마치 기계적으로 여성의 숫자를 맞춰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처럼, 없어도 무방한 자리에만 여성이 있다. 이럴 거라면 차라리 아무도 없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재난을 다루면서 책임을 다루지 못하면, 재난은 관심을 끌고 시간을 소비하기 위한 소재로 전락한다. 재난은 그 스펙터클의 크기로 인해 매력적인 창작의 소재가 되지만, 수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는 현실의 사건이기에 다루는 자의 책임과 윤리도 그만큼 강하게 요구된다. 재난 이후에 벌어질 노동자들의 분투를 미화하는 것은, 재난 이전에 그들의 희생을 막을 수 있었을 조치들을 취하지 않은 책임을 지우는 일이다. 인간의 손으로 막을 수 있었던 일을 제대로 추궁하지 않는 재난 드라마는 프로파간다로 전락한다. 


영웅을 만들면, 재난은 자연적 배경이 된다. 야쿠쇼 코지의 뛰어난 연기는 - 그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겠으나 - 요시다 소장을 너무도 '위대하게' 만들었다. 영웅의 머리를 감싼 광채는 주변의 시야를 가린다. 발전소와 사람들이 구르고 깨어지는 가운데 재난의 책임은 사라지고, 먼지가 가라앉은 자리엔 최선을 다한 영웅들만 서 있다. "이것은 천재인가, 아니면 인재인가"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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