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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an 04. 2023

귀걸이와 코걸이

23.01.04. 로레인 대스턴, 도덕을 왜 자연에서 찾는가?

새벽에 일어나 로레인 대스턴의 <도덕을 왜 자연에서 찾는가?>를 읽었다. 얇은 책이고, 결론은 매우 간결하나 그 안에 담긴 생각들을 다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으리라 짐작된다.


책 도입부에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사회적 다윈주의에 대한 비판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범상치는 않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여성, 장애인,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종종 본성에 어긋난다, 자연적 질서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어 정당화를 시도하는데, 사실 자연이 도덕에 정당성을 곧바로 보증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들 잘 안다. 문제는 왜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자연이 도덕 규범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대상으로 끈질기게 살아남느냐는 거다. 이 책이 묻는 것도 그거다. 자연이 뭐길래 도덕이 끊임없이 찾아 오는가?


읽은 바를 요약하자면, 인간은 지각할 수 있는 자연의 질서를 넘어서는 또 다른 질서를 상상하기 어려우며, 질서가 없는 규범은 없기에, 도덕 규범은 끊임없이 자연의 질서를 참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연의 질서는 서로 상충하는 수준으로 다양하기에 어느 한 면이 그것을 닮았다고 해서 도덕 규범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자연의 질서를 모방하는 게 인간 본성상 죄는 아니지만, 자연이 도덕 규범을 온당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이현령 비현령은 숙명과 가깝다.


다만 부자연스러운 것들을 감각하면 사람들은 공포, 두려움, 경이로움과 같이 고통과 흡사한 격정에 휩싸이는데, 이를 해소하기 위해 자연을 묘사한 도덕적 질서나 규범에 매혹을 느낀다. 인간은 자연에서 기대와 예측이 가능한 일관성을 추출해 도덕과 법의 토대를 세우려는 시도를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자연법을 언급하는 사상가들의 저작을 읽을 때마다 대체 그 자연법이라는 것은 어느 자연을 말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운 동시에 직관적으로 와 닿는 부분들이 있어 항상 의아했는데, 그 궁금증이 어느 정도 풀리는 대목이었다.


마침 요 직전에 읽은 책이 조무원의 <우리를 바꾸는 우리>인데, 로레인 대스턴의 책에 짧게나마 자연법과 홉스의 자연상태에 대한 언급이 나와 앞선 책을 계속 참고하게끔 만들었다. 홉스의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최소한 우리가 합의한다면 분배에 대한 권위 있는 대표를 형성할 수 있다는 계산은 할 수 있는데, 대스턴이 이야기하는 혼돈 상태는 이것보다 좀 더 무질서하다. 기대도 예측도 불가능한 상태는 정치체의 형성을 요청할 수 없기에, 적어도 인간은 예측 가능하고 계산 가능하다는 믿음은 부여되어야 한다. 그 근거를 자연에서 찾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그것이 그닥 온당한 주장이라고는 안 보는 것 같다.


자연으로부터 유추한 규범의 타당성은 그 매력에도 불구하고 없다는 주장은 오늘날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규범을 정당화하려는 수많은 프로파간다가 얼마만큼의 개소리인지 판단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든다. 철학을 따질 줄 모르는 아마추어는 그 정도 선까지만 가도 다행이 아닌가 싶긴 하지만.


잠에서 깼을 때 바로 잠들지 않고 또 뭔가를 읽느라 3시간도 못 자게 생겼다. 그나저나 분명 서가에 있었던 <랑시에르의 교훈>이 어디에 갔는지 찾을 수가 없다. 누굴 빌려준 것인가. 이거 찾다 밤 새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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