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반년의 출발점에서
살랑살랑 바람이 분다.
거실의 창과 베란다로 열린 틈 사이로 신선함이 통과하는 중이다.
6월의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사라졌고 이젠 7월을 맞았다.
이십여 일이란 날짜가 블랙홀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가 순식간에 사라진 느낌이다.
눈을 떠보니 다시 아프리카의 르완다였고 시간을 복기해 보니 3주간을 바둥거리며 서울에서 보내었다.
장인어른이 위독하시다는 전갈을 받아 긴급으로 7일을 허락받았고, 약속한 날이 다할 즈음에 소천하셔서 14일을 추가로 머물 수 있다는 여유를 얻었다. 사망의 날이 다소 어긋났다면 나는 필연코 아프리카로 돌아왔어야 했다. 장인어른의 임종에 즈음하여 대안하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던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 쪽 가족 중에는 그간 소원했던 관계들이 죽음을 전후로 회복되어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분들의 애정과 헌신으로 장례를 순조롭게 마쳤으며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서울에 머문 3주간은 하루도 쉴 사이 없이 그간 미뤄두었던 일들을 손봐야만 했다.
때마침 나가버린 LED등을 교체했고, 조금씩 새기 시작한 수전함을 새로 사서 교체했다. 바꾸는 김에
수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비데를 설치하느라 뻑뻑한 파이프들을 돌리고 조이기를 반복했다.
아내 혼자서는 처리하기 어려웠을 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온 틈에 동시에 터져 나왔다.
자동차는 갑자기 리어미러가 접히지 않고 소음이 나기 시작했고, 아이들의 치과와 안과 진료 일정을 잡아 하나씩 해결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사이에 르완다로 가져갈 음식과 물품을 사들이고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짐을 꾸렸다. 이제는 현지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알기에 풍족하고도 다양한 물건이 있는 한국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만 했다.
내가 필요한 것과 부탁받은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하며 준비했다.
들어와서 헤롱 대며 시차에 적응하느라 일주일을 보냈고, 장례와 삼우제로 한 주를 더했으며,
극적으로 연장된 시간에 교회에 출석해서 교인들과 만나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아프리카에서는 운전을 할 수가 없어서 한국에서 다시 차를 몰 수 있을까 걱정을 했지만
장지까지의 장거리에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오히려 신호위반 딱지가 날아온 것을 보면
질주본능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아무튼 다시 르완다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나서야 깊은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내와 함께 누울 수 있어서 행복했고, 딸과 포옹할 수 있어서 기뻤으며, 아들과 함께 비행기에 오를 수 있어서 더없이 감사했다. 서울에서의 내 역할을 마치고 다시금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아프리카를 향할 수 있어서 설레었다. 비워두었던 학교로 돌아오니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기쁘게 반겨준다. 평상시에 잘 표현하지 않던 학생들도 내 주변에 와서 많이 기다리고 보고 싶었다고 말해주니 핑 도는 감동이 인다.
머리를 길어서 묶은 아들을 바라보며 여자인지 남자인지 궁금해하는 아이들의 시선을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다.
아들도 큰 결심을 하고 나의 르완다행에 동참해 주었다.
한 달을 결정하고 나왔지만 내가 머무는 동안, 7개월 안에 어느 때나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왕복비행권이다. 대안학교의 고3이라 입시의 압박에 눌리지도 않으니 나는 그가 맘껏 아프리카를 만끽하고 자유를 숨 쉬며 자기의 길을 찾아가기를 기대할 뿐이다.
그가 여기에 오겠다는 결심을 한 것도 놀랍지만, 그의 마음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경탄할 뿐이다.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놀랍고 귀한 말씀을 나눠주신다.
부모가 자녀에게 꼭 하고 싶지만 자칫 잔소리로 치부될 수 있는, 그러나 타인의 입을 통해서라면 충분히 경청하고 값지게 새겨들어야 하는 잠언들. 봉사 나온 청년들과 어른들에게서 진솔한 조언을 듣는 중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아들에게 열악한 삶을 보여주고 있고, 세계 여러 나라의 음식을 선보이며, 미술을 감상하고 역사의 현장을 방문하고, 현지 친구들을 붙여주는 중이다. 무엇보다 늘 붙어있으면서 함께 밥도 먹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침에 깨어서 식사를 준비하고 누군가와 함께 음식을 나누며 대화를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절로 흥얼거린다. 콩나물무침을 제법 잘 만드는 아들이 저녁을 준비하기도 하고 내가 요리를 할 때가 있지만, 어떠하든 함께여서 든든한 안정감이 있다.
분명한 것은 아들이 한 달을 머물든 그 이상을 여기에 있든 그는 이미 이전의 존재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프리카의 결핍과 여유, 극한 빈부의 차이와 역동과 성실함, 칼라풀한 문화는 너에게 깊은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문화를 누리고 이들의 치열함을 배우며 언어적 자극을 잘 받아서 흡수하기를 바란다.
이곳의 국제학교로 와서 공부해 보는 것도 괜찮고, 국립공원과 역사의 현장을 밟아보면서 세계사를 배웠으면 좋겠고, 여러 나라의 외국인들과 친구 하며 언어를 익히면 재밌을 것 같다.
어쨌든 아들과 함께 돌아온 키갈리에서 다시 하반기의 일정에 집중하기로 마음먹는다.
장인의 소천이 아니었다면, 잠시라도 한국에 돌아갈 수가 없었을 것이고, 하염없이 슬프고 힘들었을 아내를 위로할 길이 없었을 것이며, 제한된 경험세계에만 머물렀을 아들을 데려올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사춘기의 딸을 어떻게 설득할지는 여전한 숙제다.
갈 길을 몰라하고, 길이 없어서 좌절해 있을 때, 어찌할 바를 몰라서 눈물 흘리며 기도할 때
눈물을 닦으시고 위로하시며 예상치 못한 길을 만드시는 그분의 인도하심에 감사하는 나날이다.
그렇게 나의 7월이 시작되고 있다.
아들과의 동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