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달라고 기도했던 날

지진이 발생한 날의 동해와 이태원

by 준구


10월 29일 토요일 아침, 오전 8시 27분에 기상청으로부터 긴급 문자를 받았다.

“충북 괴산군 북동쪽 12Km 지역 규모 4.3 지진 발생 ”

문자를 확인하고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이내 앉아 있던 의자 밑으로 날카롭고 섬뜩한 진동과 울림이 일었다. 딸애도 지진의 움직임을 감지했던지 방에서 황급히 뛰어나와 거실에 있던 내게로 달려왔다. 이런 긴박한 상황과 깜짝 놀란 순간에도 누군가와 통화 중이던 아내는 지진을 미처 느끼지 못하는 터였다. 우리 가족은 그날 강원도 양양의 바닷가 근처 연수원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을 맞이한 상황이었다.

이제는 크고 작은 지진이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발생하는 터라 놀랍거나 생경한 일도 아니지만 지진을 온몸으로 느낀다는 것은 여간 공포스러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불과 몇 년 전엔 경주 포항 지역의 땅이 뒤틀리고 갈라지면서 창문이 깨지고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아찔한 상황을 피해 황급한 도피하던 시민들의 모습을 보기도 했다. 발끝에서 머리끝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지진의 출렁임은 놀랍고도 두려운 충격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태어나서 처음 온몸으로 땅의 뒤틀림과 요동을 느껴본 것은 공포와 패닉 그 자체였다.


지진을 직접 경험했던 십오육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그때 나는 우간다와 르완다를 거쳐 콩코의 부카브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지프를 타고 나라와 나라의 접경을 넘어서 도시를 옮겨가며 영상을 제작하는 중이었다. 뉴스에서 지진이 있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TV의 보도보다 더 생생한 지진의 현장에 허물어져 내린 집들을 두 눈으로 확인하며 여진이 남아있는 지역을 향해 진입하고 있었다. 목재와 진흙으로 얼기설기 지은 집들은 여지없이 허물어졌고 군데군데 긴 균열을 남긴 곳도 눈에 띄었다. 맨 흙으로 닦여진 길에서도 지진이 비틀고 간 균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도착한 탄자니아의 게스트하우스는 2층 규모의 아담한 건물에 너른 잔디가 펼쳐진 곳이었다. 진흙빛 대지 위에 더 진하고 붉은 벽돌로 싸아 올린 고풍스러운 숙소였다.

도심을 벗어난 아프리카의 저녁은 금세 밤을 재촉했다. 몇몇의 가로 등불이 맹렬한 빛을 발할수록 사면은 더욱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한다. 우리 스텝들은 각자의 방으로 이동해서 피곤한 몸을 뉘었다. 온종일 아프리카의 거친 비포장도로에서 시달린 육체는 그야말로 파김치처럼 너덜거리며 침대 위에 쓰러진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의식을 잃고 뻗은 상태에서도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누워있는 발 끝에서 몸으로 이동하며

머릿 쪽으로 빠져나가는 땅의 격한 울림에 놀라 잠에서 깼다. 몸이 조건반사적으로 반응을 보이며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고 의식은 그 뒤를 따라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아! 이것이 말로만 듣던 지진이로구나 스스로 깨달으며 어두컴컴한 벽면을 더듬어서 스위치를 눌렀다.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지진이 휩쓸고 지나간 공포가 아직 남아있는데 전기불까지 들어오지 않으니 순간적으로 두려움과 패닉에 빠져들었다. 그야말로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깜깜함인데 만일 건물이라도 무너진다면 압사당할 수 있다는 판단에 이르자 더듬으면서라도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복도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웅성대는 소리를 들으며 일단 몸을 야외로 피했다. 우리 일행과 투숙해있던 사람들이 대부분 지진의 진동에 놀라서 깨어 대피한 상태였다. 그렇게 바깥에서 한동안의 시간을 보내다가 피로와 쌀쌀한 날씨로 인해 조심스럽게 자신의 룸을 찾아서 돌아갔다. 어쩔 수 없이 실내로 돌아오긴 했지만

불안한 마음에 쉽게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다시 발생할지 모를 여진을 염려하며 책상 밑이나 침대 가에서 머리를 보호한 채 몸을 곧게 세우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엄청난 소동 와중에도 잠에 깊이 빠져서 세상모르게 취해있었던 스텝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날이 밝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 시간 이후 나는 한잠도 자지 못했다.

전기가 복구되어 다시 불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수도 있다는 극한 공포에 직면해 있었다.


납작 엎드려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제발 지진을 피해서 이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게 해 달라는 애원이었다.

이렇게 낯선 타국에서 죽을 수 없고, 이제 겨우 첫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위해서라도 나는 살아야만 한다고 온갖 이유각 붙여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했다.

이런저런 근거와 눈물 콧물을 쏟으며 씨름하듯 나의 목숨을 보존해 달라고 신에게 빌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연장된 나의 삶을 타인을 위해서 유익하게 사용하겠노라는 다짐도 해보았다.

그래서였을까 큰 여진 없이 밝아오는 태양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를 느끼는 순간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해 있음을 온몸의 세포와 감각이 감지하는 시점이다. 그날 밤 이태원의 골목에 갇힌 사람들 역시 극한의 공포와 패닉 속에서 하늘을 향해 간절한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외신들의 리포팅에선 치안과 안전이라면 세계에게 둘째가라면 서러울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데 의아함을 표하고 있다.

올 들어 반지하에서 사는 사람들이 쏟아져 내리는 비에 수몰되어 죽었고, 빵을 만드는 노동자는 반죽기에 빨려 들어가 생을 마감했으며, 지하에 매몰된 광부의 구출은 요원하기만 하다. 이태원에서는 꽃다운 쳥년들이

스러졌지만, 우리 삶의 노동 현장과 은퇴 후의 핍절한 삶으로 내몰리는 노령인구가 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 사회가 안전망을 갖추지 못한다면 개인들이라도 주변을 둘러보아야 한다.


사회가 안전하지 않는데 소신과 사명감을 갖고 책임을 지겠다는 지도자들의 자세를 찾아보기 어렵다.


돈과 물질과 생산성에만 주목하면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작은 자 하나에게 주목하기 시작하면 그 사회는 안전할 뿐만 아니라 살만한 온기가 흐르는 정의로운 공존의 공간으로 변한다.


나는 그때 하늘을 향해서 간절한 기도를 올렸었다. 제발 나를 살려달라고......

절절한 기도를 모두가 올렸을 것이되 그에 대한 응답은 삶을 가르는 결과로 나타났다.


생각 끝에 깨닫는다.

우리가 서로의 하늘 이어야 한다는 것을

사람이 곧 하늘이고 하늘이 곧 우리의 공동체라는 사실이다.

하늘은 인간이 사람들 속에서 신적 역할로 서로를 섬기고 돌볼 것을 기대하는지도 모르겠다,

신도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을 감당하는 것은 사람 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비껴갈 수는 없지만 수를 다해서 인간답게 사는 것은 사람의 권리이다.

지금은 애도하지만 분명히 따져볼 것이다.


암흑 속에서 지진의 공포로부터 벗어났던 밤을 떠올리며 초심을 되뇌어 본다.

공존을 위해 이타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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