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서 1990년까지 선자이야기
파친코 드라마의 첫 프롤로그에서 영상미학의 정수를 만난 것 같았다.
1900년대의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은 어촌마을의 허술한 초가를 배경으로 하지만 화면은 자연과 더불어 아름다운 산수화처럼 그려졌다. 영상 전체에 흐르는 톤은 화려하지 않지만 묵직한 진중함으로 빛났고 씬 하나하나에는 섬세한 공력이 풍겼다. 삼사 대에 걸친 대서사를 기반으로 잘 짜인 플롯의 힘이 극을 끌어 가지만, 이에 못지않은연출력과 각본 및 배우들의 연기가 드라마에 빠지게 하는 마력이다.
선자를 열연한 배우(김민하)를 드라마에서 처음 봤는데, 연기가 너무 자연스러웠다. 얼굴에서 보이는 자그마한 점 기미 하나하나가 극적인 현실감을 더했다. 묘한 동양적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 자체가 그 시절의 선자로 여겨졌다. 선자 엄마 양진역할의 배우 역시 캐릭터를 너무나 잘 소화해서 극의 몰입도를 높인다.
선자는 대사와 동작을 바탕으로 인물을 표현하지만 얼굴의 미세한 떨림까지도 섬세하게 연기해 냈다. 분노할 때, 기뻐할 때, 섭섭했을 때, 환희를 느낄 때마다 얼굴에 드러난 미세한 경련과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코를 씰룩거리며 울까 말까 고민하면서도 감정을 절제 있게 조율해 가는 모습에서 깊은 내공이 풍겼다.
많이 봐왔던 연기자가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깊이 있는 연기력을 발산할 수 있을까 경이로웠다.
어린 시절의 선자나 나이 들어서의 선자 역할을 맡은 연기자 역시 두말할 나위 없이 연기를 잘한다. 윤여정의 연륜이야 자연스러움 그 자체의 중후함이지만 어린 선자까지 그렇게 천진난만할 수가 없다.
익히 아는 연기자라면 한수역의 이민호와 정은채 정도인데 이들 모두 역할에 충실한 연기력을 뽐냈다.
영상 구성의 완성도가 높다고 느껴진 이유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교차편집에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을 이야기하다가 1989년의 일본 오사카가 등장하고 1960년대의 뉴욕이 교차되는데, 이는 원작 소설과는 다른 각색에 의한 시각적 재구성이었을 것이고, 어느 정도의 분량을 미리 촬영해두지 않았다면 가능할 수 없는 나열이다. 시대와 공간을 넘나 들면서도 그 흐름의 개연성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영상에 더해지는 펼치는 느슨함과 몰입과 긴장감의 리듬감을 쥐락펴락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야기의 전개에 눈과 마음을 빼앗긴 채 희로애락에 젖어 들어 몰입하다 보면 시간이 지나고 다음 편으로 홀리듯 빨려드는 마술 같은 전개가 펼쳐졌다.
실제에 기반한 디테일한 에피소드를 재현해 주었기에 그 느낌이 현실처럼 절절하게 다가왔다.
일본이 쇠퇴해 가는 조선을 야금야금 침탈하고 약탈하면서 식민지의 백성으로 전락해서 주권을 잃고 살아가야 하는 비참함이 가슴 아팠다. 술기운을 빌어야만 겨우 울분을 토해낼 수 있고 일제가 무서워 부당한 삶에 저항하지 못하고 동족을 감시하며 그들의 비위에 맞춰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민중의 현실이 저렸다.
우리말을 쓰지 못하고, 빼앗기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저항하지 못하고 숨이며 감내해야 했던 시절.
이런저런 이유로 한반도를 등지고 일본과 만주, 미대륙으로 흩어진 디아스포라 조선인의 삶은 더더욱 녹록지 않은 고난의 역사였다. 돼지우리 같은 환경과 핍박 속에서라도 살아남아야만 했던 일본 내 조선인의 고난한 삶을 잊지 않고 기록해 줘서 고맙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에게 가했던 거짓 중상모략과 박해 살육이 어떠한 연유에 근거하는 지를 잘 표현해 줬다. 재일교포들이 일본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치며 애쓰다 파친코 운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잘 납득할 수 있게 기록해 줬다.
선자는 한반도란 공간을 넘어 일본이라는 새로운 시련의 장애서도 굴하지 않는 성실한 생활력을 보여주었다. 배우지 못했지만 공부한 사람 이상의 지혜와 경륜으로 그녀는 삶을 지탱해 나갔다. 선자의 첫째 아들은 다행히 죽지 않고 일본의 외딴 지역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그려졌는데, 드라마 1,2부를 다 본 시점에서 소설과 드라마가 어떤 부분이 다른 지는 좀 더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다.
선자의 손자 솔로몬을 열연한 배우에게도 친밀감이 느껴졌다. 어눌한 한국말과 한국인 2,3세대에게 풍기는 문화적인 혼돈이 은근히 매력 있다. 당돌하고 적극적이면서 유능한 젊은 세대의 면모에 수긍이 간다.
10월의 긴 연휴에 완성도 높은 드라마 시리즈를 정주행 하게 되어 기쁘고 즐거웠다. 무엇보다 이런 내밀하고도 깊은 역사의 이야기를 오랜 시간에 걸쳐 취재하고 공부하면서 세상에 소개해준 작가 이민진의 성실함과 묵묵함에 박수를 보낸다. 한 권의 소설이 나오기까지 들였을 시간과 공력, 비용을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더구나 미국에 살면서 우리말보다 영어가 더 편했을 그가 어떻게 이런 오랜 시간의 취재와 사전조사를 기울여 대서사적 작품을 완성할 사명감을 갖게 되었을까?
법률가로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소설을 쓰기 위해 본업도 작파하고 매달렸다는 데 박수를 보낸다. 우리의 아픈 역사를 생생하고 절절하게 살려 낸 작가에게 독자로서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다. 그리고 엄청난 투자로 드라마로 재현해 낸 제작사와 스텝 연기자에게도 그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그런 거대한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스케일이 부럽고 수년간의 집중력에 감동한다.
걸작을 경험하면서 행복했다.
일본에서 살아가는 생존 한인고령자들의 육성 인터뷰가 커다란 메아리가 되어 마음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