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나의 슬픔에 공감하지 않으셨다
1979년 10.26 이후 어느 날
1979년 10.26 직후의 일이었다.
너무도 급작스러운 대통령의 죽음을 접하게 된 것은 등하교 길에 뿌려진 호외를 통해서였다.
흥분된 목소리로 “호외요 호외”하고 외치며 신문을 허공에 뿌리고 달리던 까까머리 형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나는 빠르게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신문 한 장을 주워 들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최고 권좌에 있었고, 초등학교 4학년이던 그때까지도 그 자리를 유지하던 대통령이 총탄을 맞아 사망했다는 보도였다.
순간 멍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11살의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후, TV와 신문에서는 깊은 슬픔에 빠진 시민들의 애통함이 비장한 아나운서의 멘트와 함께 매스컴을 뒤덮었다. 며칠이 지나서, 학교에서는 교직원들이 학생들을 데리고 단체로 조문드리러 갔다.
구청으로 기억되는 장소에는 넓게 국화로 둘러싼 단상 위에 초상화를 올려놓고 국상을 애도하고 있었다. 초등생의 어린 나이에도 깊은 슬픔이 몰려왔고, 우리 반 아이들은 물론 전교생은 긴 줄에 이은 기다림과 묵념의 마침까지를 침착하고 차분하게 마쳤다. 학교에 가면 ‘국민교육헌장’을 필두로 해서 ‘국기에 대한 맹세’ 국기 강하식 때의 부동자세에 익숙한 우리는 이미 형식과 규율이 익숙한 상태였다.
그날의 행사로, 다른 날과 비교해 일찍 집에 돌아왔다. 미곡상을 운영하시던 아버지는 나를 반갑게 맞이하시며 어쩐 일로 학교가 일찍 파했는지를 물으셨다. 나는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느라 수업을 단축해서 전교생이 구청으로 가서 분향했노라고 답했다. 그리고 말미에
“아버지! 저와 학생들과 거기 온 모든 사람들이 슬퍼했어요. TV에서도 통곡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던데 너무 마음이 아파요. 아버지도 슬프시죠?” 너무도 당연하게 동의를 기대하며 넌지시 던진 말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으시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셨다. 아버지는 눈빛으로 무언가를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한 동안 그렇게 바라보시더니 이내 뒤돌아서 하시던 일에 집중하셨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 평생의 삶에 각인된 긴 시간이 되었다.
찰나가 영겁으로 둔갑한 순간.
아버지는 결단코 동의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공감하지도 않으셨다는 느낌이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 순간은 내게 강력한 의문의 메시지를 남겼다. 아버지의 눈빛은 아마도 내가 평생을 풀어야 할 의문의 수수께끼일지도 모른다는 숙제를 안겼다.
우리 집은 미곡상과 가정집이 합쳐진 형태로 수유대로 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뜻 모를 눈빛을 접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서 이번에는 대대적인 군병력의 이동을 목격하게 되었다. 집 앞 8차선의 도로 양쪽이 갑자기 국군의 날 행사 때에나 봤을 법한 무기들의 퍼레이드로 이어졌다. 군인을 실어 나르는 트럭에 이어 장갑차와 탱크가 쉼 없이 도심의 중심부로 이동하고 있었다. 도로가에 선 시민들은 이것이 국군의 날 행사인지 어떤 그 무엇인지 모르는 의아함으로 가공할 무기와 병력의 이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의 기억은 그것이 1979년 12.12의 전후였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으로만 남아 있다.
아니, 1980년 5.18의 전후였을 지도 모른다. 그때 그 많은 병력과 무기들이 오랜 시간 밝은 낮 시간에 8차선의 도로를 꽉 채워서 어딘가로 향했다는 기억만이 또렷할 뿐이다.
'안경을 쓰시고 밝은 태양 아래로 나와서 신문을 촘촘히 읽어 나가시던 아버지, 지금의 나보다도 젊었을 그는
그 작은 문자의 행간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내를 일찍 하늘로 보내고, 남겨진 자녀들을 홀로 건사해야만 했던 가장의 무게는 또 얼마나 힘겨운
것이었을까?'
조부모님이 가난한 시골의 논 밭을 팔아 아들을 공부시켰고, 사학을 전공하셨던 아버지는 근사한 직장보다는 당장의 수익이 많은 미곡상을 선택했다. 1933년생의 똘똘했던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알았으며, 한자에 능했고 영어를 즐겨 들으셨다. 식민지 조선의 가난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조상의 전통에 의해 조혼으로 맺어진 아내를 맞이했다.
6.25 직후의 배고픈 군생활을 경험했고, 기혼의 몸으로 대학생활에선 신세대의 여성들을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돌아가신 지 몇 해가 넘어가지만,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촘촘히 남겨드리지 못했음이 늘 짐으로 남는다.
우리 집 쌀가게의 이름은 “광주상회”였다.
충남 서천이 아버지의 고향이라 광주와는 거리가 있고, 그것이 경기도의 광주였는지, 전라도의 광주였는 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1979년의 혼돈과 숨죽이던 희망은 1980년으로 이어졌고, 머지않아 이내 진압당했다.
당시 대학생이던 나의 누나들과 형은 천진난만하던 나와는 달리 숨 막히던 시절을 또다시 연장해서 살아야만 했고, 말 못 하는 아버지의 눈 빛은 또 한참이나 오래 이어질 시간으로 접어든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