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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구 May 29. 2020

스쳐간 사람들의 친절이 생각날 때

유치장의 기억

그날 아침에 형사 여럿이서 우리집을 덮쳤다. 

나의 이름을 부르더니, 신을 벗지도 않은 채 마루에 올라와서 서가의 책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불온서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가차 없이 증거물로 압수했다.

이른 아침에 들이닥친 가죽잠바 사나이들의 위세에 눌려 나는 순순히 그들의 봉고에 태워졌다.

“좋게 말할 때 머리 숙이고 밖을 내다보지 마!”

짧고 위협적인 그들의 경고에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가 끌려가는 곳이 남산이 아니기만을 바라면서.  

  

1990년 어느 날, 나는 청량리 경찰서의 대공과로 연행되었다. 두려움에 가득 찼던 내가 다소의 안도감을 얻은 것은 이미 잡혀와 있는 편집실 동기와 선배를 보고나서였다. 우리는 서로 눈인사를 주고 받으며 각자 조사를 받으러 헤어졌다.

노태우 정부의 학생운동 근절에 대한 욕망은 검찰과 경찰의 신속한 연대로 이어졌고, 짧은 시간 내에 성과를 내야하는 작업이었다. 경찰은 우리가 발간한 것이 아닌 선배들이 출간한 교지의 내용을 토대로 죄목을 만들어 냈다. 민중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에게 북한 고무 찬양이라는 얼토당토않은 항목으로 뒤집어 씌우려니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조서를 작성하는 형사들은 사회과학적 개념과 내용을 이해 못해서 되레 내게 물어보며 내용을 수정해야만 했다. 그 디테일한 구분이 안 되니 그냥 뭉퉁구려 빨간색이 칠해지는 것이었다.

     

조사받는 동안, 나는 상기된 표정으로 몇 번씩 화장실을 드나들었고 이때에도 감시의 눈길이 따라 붙었다.

앞으로 어찌될 것인가 큰 한숨을 쉬며 소변을 보는데, 따라 나온 전경의 나에게 한마디 한다.

“너무 떨지 마세요. 괜찮을 겁니다.”

나는 그의 선의에 놀라 눈길을 그에게로 돌렸다.

“저는 전라도에서 사는 대학생인데 전경으로 차출되어 이곳에서 복무하고 있습니다. 요즘도 휴가 나가면 한번씩 대모에 참석하곤 해요. 제가 오월대 (녹두대) 출신이거든요.”  

그의 말에 두려움이 싹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전국 단위의 집회에서 맨 앞에 나서  대오를 지켜주던 대학생들은 바로 전남대와 조선대의 오월대와 녹두대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곳에서 이들을 만나 예상치 못한 위로를전해들었다. 집회현장에서 잡혀왔으면 좀 맞았을지 몰라도 국가보안법이라면 사람을 막 대하진 않을 것이라는 말도 했다. 아무튼 그의 마음 씀이 고마웠다.

    

조서를 작성하는 동안 경찰은 내게 잘 대해주었다. 점심과 저녁은 그들이 시켜먹는 음식을 동일하게 주문해 주었다. 그들의 손에 놓인 이상 뭐 달리 부인할 것도 크게 잘못한 것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당시는 영장 없이도 48시간 구금이 인정되었던 때였다.

이틀간 자정에 가까운 조서 작성이 계속 되었다. 피곤에 쩔어 유치장으로 돌아오니 동기가 먼저 자리를 깔고 누워 있었다. 차디찬 마루 바닥에  놓여진 얇은 군용 이불 하나.

반가운 마음에 동기에게 말이라도 건네려니, 철창 너머로 경찰이 경고를 보낸다.

“조용히 취침”


춥고 두렵고 외롭고 서글픈 밤, 낯선 공간의 철창 안에서 군용담요를 푹 뒤집어 썼다.     

조서작성을 마친 날, 경찰의 태도가 사무적으로 바뀌었음을 실감했다.

수사내용과 구속여부는 검찰로 넘겨졌으니, 수사를 위했던 친절도 거기에서 멈춰졌다. 나는 유치장으로 돌아와서 구속여부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유치장에는 이미 십여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고 점심으로 제공될 급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안에서도 죄질에 따른 질서가 존재했다. 나이 드신 분들이 나에게 어떻게 들어왔냐고 물었다. 학생이고 반정부 투쟁으로 오게 되었노라 얘기했다. 양복에 넥타이를 매신 신사분이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그래 학생들이 고생이 많다. 학생 밥은 내가 살테니 맛있게 먹어라”

내게 난데없는 호의를 베푸셨다. 그분은 경제사범으로 들어오신 분이셨다.

또 한쪽에는 절도와 성폭행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서는 죄질이 나쁜 놈들이니 저기 가까이 가지 말라는 당부도 하셨다. 그분의 친절로 나는 두끼 정도를 사식으로 해결했다. 외부에서 배달된 설렁탕은 깍두기까지 맛이 좋았다.     


검찰의 기소 여부를 기다리는 동안 막연한 불안함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정부의 대대적인 검거 열풍과 전에 구속된 편집장 선배와, 위협에도 굳굳히 자기 역할을 해나가던 다른 학교 친구들도 생각났다.      

48시간을 넘어서는 날, 나를 조사했던 경찰이 우리 편집실 동료와 선배를 함께 불러 앉혔다.

담배를 깊게 빨아 올리며 한마디 했다.

“우리는 이삼일 동안 잠도 못자며, 상부에서 명령한 실적을 만드느라 고생했는데.......

 너희를 그냥 풀어 주란다.......   검찰에서 기소를 안 한다는데.......

 너희들 참 빽도 좋은가 보다.“     

‘응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빽이 좋아서 풀려난다니.......’

사실이 그랬다.

잡혀온 4명중 하나의 부모님은 검찰의 기소 여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런 분이셨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우리가 잘못하지 않아서 당당했지만, 현실에서 작동한 것은 힘의 논리였다.      


그날, 경찰서를 나오면서 동기의 부모님은 우리에게 소갈비를 사주셨다. 입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리던 소갈비의 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그 음식을 대접해주신 어머니께 인사라도 드려야하는데, 사는 게 분주하기만 하다.   

  

그때 압수당한 금서이자 양서들은 챙겨서 나오지 못했다. 몸만 나온 것만으로도 그 자유로움이 커서 더 지체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회에 나와 '경찰24시'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경찰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검찰이 지나치게 권한을 독점한다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수사권 조정은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다. 시대도 변화해서 전처럼 검.경을 이용한 통치의 시대는 아니라고 믿는다.  

   

그냥 가끔, 그때 내게 호의를 베풀어 준 전경 친구와, 사식을 사주셨던 신사분에게, 그리고 친구의 어머니에게 감사했노라고 인사드리고픈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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