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되지 않은 하늘빛에 반사된 호수의 표면은 바닷물처럼 엷은 파랑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내가 인식하는 호수는 그 크기가 아무리 넓다고 해도 좌우의 시야 안으로 한눈에 들어오는 것인데 빅토리아호는 달랐다. 호숫가를 돌아선 길에는 긴 모래사장이 펼쳐진 바닷가 백사장이 나타났고 수영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수평선 부근으론 섬이 떠있는데 이것은 바다다. 호수라고 들었는데 바다처럼 밀물과 썰물이 들어 모래사장에 찰랑인다.
‘세상에는 이렇게 넓은 바다 같은 호수가 있다니’ 새삼스럽게 나의 좁은 인식에 놀랐다.
빅토리아 호수를 처음 본 것은 2003년이었고, 그 후 서너 차례 더 방문해 우간다에서 배로 호수를 가로질러 탄자니아로 갔다. 바다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은 빅토리아 호수는 넓고도 아름다웠다. 우리 남한 땅의 70%에 해당하는 호수면적에 평균 수심이 40미터니 나의 느낌은 바다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이고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제일 큰 사이즈이니 그럴 법도 하다.
호수 북쪽의 엔테베에서 배를 타면 호수의 남쪽인 탄자니아의 므완자까지 꼬박 하룻밤 길을 달려야 한다. 배 위에서 바라보면 사면에 망망대해가 펼쳐지고 가끔은 섬이 보인다. 배의 진행방향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육지가 있다면 그건 우간다이고 왼쪽 방향이 케냐 남쪽 도착지가 탄자니아다. 황량한 아프리카 대륙에서 이렇게 넓고 풍부한 수량과 접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축복이다. 간간히 어부들이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낚는 모습도 보인다. 호수에서 잡아온 띨라피아를 튀기면 맛도 좋고 양도 풍성하다.
빅토리아호수
내가 우간다에서 배를 타고 탄자니아의 부코바와 므완자로 이동한 것은 아프리카에서 사역하는 선교회를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우간다, 탄자니아, 르완다, 콩고, 부룬디에 사역지를 둔 선교회를 촬영하려면 빅토리아 호수를 건너야 했다. 사람과 짐을 싣고 국경을 넘는 배는 수백의 사람과 짐들로 뒤섞여 있다. 침실을 배당받아서 선내 공간에 머물러야 했지만 배에서 나는 기름 냄새와 사람들의 몸에서 나오는 땀내 등 설명하기 힘든 역겨움을 피해 갑판으로 나왔다. 미리 준비해온 침낭을 펼쳐서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촬영 스텝과 선교회 스텝 등 대여섯 명이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누웠다. 고요한 달빛에 반사되는 호수의 아름다움 깨는 건 배의 엔진 소리다. 쉽사리 잠들 것 같지 않은 밤에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교사님은 이 호수 위에 배를 띄우고 싶다고 말문을 열었다.
의료시설이 취약한 아프리카의 호수에 의료 선박을 건조해서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료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간다와 탄자니아는 물론 케냐를 오가며 의술을 베풀고 싶다는 꿈을 말했다. 더불어 선박이 정박하는 포트에는 학교를 세워서 사람들을 교육하고 가난한 땅에서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을 길러내고 싶다는 말도 했다.
우리는 실제로 빅토리아 호수의 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방문했다. 섬의 숫자만도 일천여 개에 이르는데 사람이 사는 섬도 1/3 가량 된다고 한다. 가난한 아프리카 땅에서, 사람들과도 동떨어져 있는 섬이라면 모든 것이 부족하기만 하다. 물자와 위생시설, 교육과 문화라는 것이 존재하기 어렵다. 그 흔한 아스피린과 소독약 소염제 하나가 없어서 고통받는 사람이 수두룩 했다. 식량과 물과 위생은 수준을 논하기가 어렵다.
그런 현실을 늘 보아온 사람이라면 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고 건강을 돌봐주고 싶다는 바람은 지극히 당연한 소망이다. 그렇더라도 한두 푼이 드는 것도 아닌 의료 선박과 대학을 짓는 꿈을 당당히 말하는 것은 허황된 소망처럼 들렸다. 2003년 처음 그와 함께 건넜던 배에서 나는 조금은 황당하고 원대한 그의 꿈을 들었다.
그렇게 그다음 해인 2004년에도 그와 함께 배에 몸을 실었고, 2009년에도 빅토리아 호수를 건넜다.
지친 몸으로 도착한 므완자는 기기묘묘한 바위들로 아름다운 언덕들이 많은 곳이었다. 언덕 위의 집들은 유럽 스타일로 지어진 멋진 집들로 가득했다. 반면 부코바는 아직 개발이 안 된 드넓은 대지위에 덩그러니 허름한 교회만 자리 잡고 있었다. 현지인들은 선교회에 학교와 병원을 지어달라고 간곡한 부탁과 요청을 거듭했다.
'가난한 자기들의 정부에 요청하는 것보다도 더 현실적이고 빠르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돈 없이 가난한 선교회에 무리하게 부탁을 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가난을 외면할 수 없는 양심 사이에서 고뇌하는 순간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그런 순간들을 취재하고 다닌 지도 십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눈빛이 맑은 사람들
대학부지에 학부 건물을 올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양재 학교를 운영해서 마스크를 만들어 주변 마을과 이웃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레귤러 한 의료진을 두지는 못했지만, 미주와 한국에서 자원한 의료봉사자들이 빅토리아 호수에 띄운 의료 선박을 타고 진료를 다니기 시작했다는 뉴스도 접했다. 세브란스 병원도 선교사들의 헌신 위에 초석을 닦았듯이 그렇게 띄워진 의료 선박과 대학이 아프리카를 빛낼 날들이 곧 오겠다는 희망을 엿본다.
서너 번 우간다에서 탄자니아를 이동했는데 딱 한번 경비행기를 탄 적이 있다.
순식간에 바다와 같은 호수를 건넜다. 뱃멀미하며 밤새워 고생한 꼬박 하룻길의 험난함이 주스 한잔 마시고 잠시 창가를 내다보는 사이에 착륙을 알린다. 불편함이 없는 잠시의 시간 속에는 밤하늘의 달과 별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망상과도 같던 꿈을 나눌 시간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