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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후의 산책

걸으면서 나누는 대화의 맛

by 준구

유난히 비가 잦은 5월이다.

금요일에 내린 비는 장마철의 강우처럼 굵고 억센 데다 비바람을 동반해서 매서웠다. 토요일 아침 청명한 하늘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햇살은 그래서 더 반가웠는지 모른다.

여유로운 아침을 먹고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다. 코 앞 수락산이 앞마당 격이라 토요일 일상에 걷기가 자리 잡았다. 몇 발자국만 내딛으면 시작되는 숲의 오솔길이 초록의 현란함으로 우리를 맞는다. 흙과 나무가 물기를 머금으며 유난히 은은하고 깊은 숲의 향기를 내뿜었다.

길에 쌓인 낙엽과 솔잎이 쿠션처럼 부드러운 황톳길을 사뿐히 밝으며 나아간다. 멀리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이 청아하고 부리로 나무를 쪼아 대는 딱따구리의 목탁 같은 리듬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들판에 피어난 노란 꽃을 바라보다 어느덧 군락을 이룬 꽃밭에 눈길이 머문다. 지난번 산책땐 눈에 띄지 않았는데 한 두 주 사이에 노랗게 만발해서 어여쁜 자태를 드러냈다.

길게 뻗은 나무와 싱그러운 초록으로 빽빽한 좁은 길을 나란히 걸으면 보폭과 호흡이 같은 박자로 움직이고 있음을 발견한다. 한 주일 동안 각자의 일터와 삶 속에서 겪은 일을 나누다 보면 마음의 짐이 서서히 증발되어 가벼워진다. 걷다가 숨이 차오를 때면 벤치에 앉아서 숨을 고른다. 물로 목을 축이고 준비한 간식을 먹으며 우리를 둘러싼 나무와 숲 사이에 바위처럼 묵직하게 머문다.

초록초록한 나무들이 뿜는 피톤치드의 상쾌한 향이 적당하게 시원한 산바람에 실려와 땀을 식히며 허기를 자극했다.

KakaoTalk_Photo_2025-05-19-13-29-19.jpeg 오솔길의 꽃
KakaoTalk_Photo_2025-05-19-13-29-30.jpeg 수락산 둘레길

지난주엔 영상제작을 통해 20여 년 이상의 연을 맺은 수원지역 호스피스재단을 방문했다. 재단 홍보 영상을 다시 제작할 여력은 안되는데 3년 기한의 이사장 임기가 완료되어 부분 교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새로 선출된 이사장을 인터뷰하는 김에 센터 봉사자들의 모습을 추가 촬영키로 했다.

호스피스재단은 삼십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는데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봉사자들을 만났다. 50대에 시작하셨던 분들은 이제 칠십 백발이 되셨고, 근 30여 년을 빼먹지 않고 자리를 지키신 팔순에 이른 봉사자분도 계셨다. 몸이 허락하는 한 누군가를 돕는 일을 멈추지 않으시겠다며 노부부는 함께 센터에서 여러 가지 일을 섬기는 중이었다. 간혹 보이지 않는 어르신이 계시다면 소천하셨음이 분명했다.

"호스피스센터는 환자들이 죽으러 오는 곳이 아니라 죽음을 준비하러 오는 곳이다."

봉사자들은 그들의 몸과 마음을 돌보며 두려움과 외로움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의 한결같은 모습을 보면서 삶의 고결한 단면을 보았노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KakaoTalk_Photo_2025-05-19-13-30-00.jpeg 쉬어가는 벤치


아내도 녹록지 않은 직장생활에 관해 이야기했다. 텍스트를 외면하는 시대에 글자 매체를 생산해 내야 하는 어려움과 세대의 변화에 관한 불확실함을 털어놨다.

어떤 시원한 대안이나 솔루션을 답할 수 없는 대화였지만 바람에 넋두리를 날리듯 마음을 비워내는 시간이었다. 조금은 후련해진 마음으로 산길을 내려왔다.

비에 불어난 계곡의 물과 살 오른 피라미들을 맘껏 잡아먹고 있는 청둥오리 한 쌍을 바라보면서.


비로 촉촉해진 대지와 초록의 향연 속에 더욱 투명한 물살이 발걸음에 힘을 불어넣는다.

허벅지를 조이는 근육의 팽팽한 당김과 가벼운 허기를 느끼게 하는 식욕에 끌려 집으로 돌아왔다.


참기를 한 방울 떨어뜨려 밥을 뚝딱 비비면 그만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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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리 야생 물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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